- 철죽꽃
- 2010-07-05 15:53:14
- 조회수 : 3,387
얼마 전에 저는 경남 창원을 다녀왔습니다.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벌판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마냥 즐거웠습니다. 참 세월은 빠르기도 합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왔다고 좋아했는데 벌써 모내기가 끝나고 보리 가을(베기)이 한창이었습니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과 밀밭을 바라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 키 만큼 자란 초록빛 밀 보리밭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때도 생각났습니다. 학습반 친구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다 술래를 놀려 주려고 밀 보리밭 끝에서 끝까지 흩어져 숨어 있었는데 밭이 얼마나 크고 거리가 멀었는지 술래는 우리들을 찾다가 그만 지쳐서 우리가 집으로 간 줄 알고, 자기도 포기하고 집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님이 꾸지람을 한다고 해서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와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친구들과 함께 밀 보리밭에서 뛰어 놀다가 밀 보리를 깔고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 보니 해는 서산에 지고 그 새 날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저도 놀라서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고 슬그머니 집으로 가 보니 어머님은 없어진 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를 보는 순간 저를 부둥켜 안은 어머니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비록 그 때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찡했던 기억이 납니다. 때로는 밀 보리를 뜯어 고사리 같은 손에 비벼 씹고 또 씹어 물에 씻어 밀 껌을 만들기도 했고, 밀 보리 가을이 끝나면 이삭줍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밀, 보리 가을도 사람이 낫을 가지고 하지만, 이곳 남한 사람들은 밀 보리 가을도 기계가 하고 있습니다. 기계가 한 바퀴 돌면 밀 보리알이 산더미 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어느 덧 차창 밖에는 논벌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북한에서는 농촌으로 동원돼 풀 뽑기와 김매기가 한창일 겁니다. 뜨거운 6월의 햇볕 아래 넓은 논벼 김매기와 강냉이 밭 김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허리를 구부리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논밭을 손으로 훑고 나면 손톱 끝에서 피도 흘렀고, 손가락 피부가 거칠게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농촌 동원은 모든 게 개인 도급으로 분담을 하기 때문에 질적 수준은 어떻든 량을 채우느라 죽을힘을 다해 김을 매야 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강냉이 밭김을 매야 했습니다. 농민들은 긴 회초리 하나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자식 같은 어린 학생들을 마구 부려 먹고 일을 잘못하면 욕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는 농민은 지도농민이라는 유머도 있습니다. 모내기철이나 김매기 철이나 가을철이나 농민들은 일을 하지 않고 학교나 공장 기업소들과 가도에서 동원되는 사람들에게 지시만 하고 검열을 하느라 정작 농사일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농사가 거의 대부분 기계로 이뤄집니다. 모내기에서부터 김매기, 가을도 기계로 합니다. 그 덕에 농민들의 자식들은 모두 시내로 나가 대학에 다니거나 회사 일을 하거나, 혹은 자기 사업을 합니다. 나이 많은 분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농기계가 잘 발달돼 있어서 나이 든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일이 그리 힘들지는 않습니다.
언제쯤이면 제 고향 북한에서도 농기계를 이용해 농민들이 수월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요? 배고픈 보릿고개 넘기기도 힘겨운데 농사일까지 거들어야 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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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님의 댓글
정필 작성일참 글을 재미있고 정서있게 잘 쓰셨습니다. 한편의 서정시 같기도 하고 그림같은 글입니다.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연락처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DNK님의 댓글
CDNK 작성일철죽꽃님.항상 저희 홈피에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글을 읽을때마다 철죽꽃님이 겪으신 그 아픈 추억의 나날들이 드라마처럼 안겨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철죽꽃님의 댓글
철죽꽃 작성일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