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터민 여성의 ‘비극인생’ (1)
- 관리자
- 2010-07-07 14:16:16
- 조회수 : 3,351
어느 새터민 여성의 ‘비극인생’
[한겨레신문] 2010년 07월 06일(화) 오후 07:41|
[한겨레] 먹고살려고 남편·딸 두고 탈북
남한서도 빈곤…자살로 삶 마감
북·중·남서 3번 결혼 ‘기구한 삶’
북한에 살던 박아무개(36)씨는 1997년 12월 잘 살아보겠다며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어머니(62)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스물 세살 때였다. 박씨는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중국인과 다시 결혼해 둘째 딸을 낳았다.
어려운 생활은 계속됐다. 남한으로 갈 기회를 엿보던 박씨는 2003년 7월 한 목사의 도움으로 필리핀을 거쳐 어머니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남한에 발을 딛기 위해 중국 국적의 둘째 딸을 중국에 남겨두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박씨는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정착했다. 20㎡ 남짓한 임대아파트를 지원받고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다달이 70여만원을 받았지만, 특별한 자격증이나 직업이 없어 생활고가 계속됐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씨는 김아무개(49)씨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전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아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지만 세 번째 남편과 알콩달콩 살며 딸과 아들을 또 낳았다. 2005년 7월에는 남편을 따라 경남 통영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횟집 생선을 운반하는 남편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남편과의 사실혼 사이가 알려지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말았다. 박씨는 2006년 7월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살고 있던 부산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구청에서 다달이 90여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기본적인 생활비를 쓰고 나면 늘 빠듯한 살림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태권도·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5~6살인 아이들 때문에 직접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오랜 기간 탈북생활을 하면서 얻은 관절통 등에다 우울증까지 겹쳤다. 환갑을 넘긴 어머니가 몸소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박씨는 5일 오전 11시께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가방끈에 목을 맸다. 한많은 이승과의 인연줄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안방에 남긴 유서에는 “자식들을 힘들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 아이를 인천의 친척에게 맡겨서 돈 걱정 없이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산진구청 주민생활지원과 차유선씨는 “박씨가 지난달 둘째 아이의 양육비를 신청한 것으로 봐 직접 일자리를 찾을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갑작스럽다”면서 “어렵게 남쪽으로 내려와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끝을 흐렸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한겨레신문] 2010년 07월 06일(화) 오후 07:41|
[한겨레] 먹고살려고 남편·딸 두고 탈북
남한서도 빈곤…자살로 삶 마감
북·중·남서 3번 결혼 ‘기구한 삶’
북한에 살던 박아무개(36)씨는 1997년 12월 잘 살아보겠다며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어머니(62)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스물 세살 때였다. 박씨는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중국인과 다시 결혼해 둘째 딸을 낳았다.
어려운 생활은 계속됐다. 남한으로 갈 기회를 엿보던 박씨는 2003년 7월 한 목사의 도움으로 필리핀을 거쳐 어머니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남한에 발을 딛기 위해 중국 국적의 둘째 딸을 중국에 남겨두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박씨는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정착했다. 20㎡ 남짓한 임대아파트를 지원받고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다달이 70여만원을 받았지만, 특별한 자격증이나 직업이 없어 생활고가 계속됐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씨는 김아무개(49)씨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전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아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지만 세 번째 남편과 알콩달콩 살며 딸과 아들을 또 낳았다. 2005년 7월에는 남편을 따라 경남 통영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횟집 생선을 운반하는 남편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남편과의 사실혼 사이가 알려지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말았다. 박씨는 2006년 7월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살고 있던 부산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구청에서 다달이 90여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기본적인 생활비를 쓰고 나면 늘 빠듯한 살림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태권도·피아노 학원에 보내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5~6살인 아이들 때문에 직접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오랜 기간 탈북생활을 하면서 얻은 관절통 등에다 우울증까지 겹쳤다. 환갑을 넘긴 어머니가 몸소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박씨는 5일 오전 11시께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가방끈에 목을 맸다. 한많은 이승과의 인연줄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안방에 남긴 유서에는 “자식들을 힘들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 아이를 인천의 친척에게 맡겨서 돈 걱정 없이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산진구청 주민생활지원과 차유선씨는 “박씨가 지난달 둘째 아이의 양육비를 신청한 것으로 봐 직접 일자리를 찾을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갑작스럽다”면서 “어렵게 남쪽으로 내려와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끝을 흐렸다.
부산/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한겨레
댓글목록
이런님의 댓글
이런 작성일한겨레신문은 왜 이런 기사를 올려 김정일에게 탈북자사회를 비난케 할 선전거리를 제공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