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아버지 팔아 중국에 ‘대가’ 요구"
  • 북한전략센터
  • 2010-09-01 10: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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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지난달 26~30일 방중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유적 둘러보기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났다.

일정 중간에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과 공장·농업시설 견학도 있었지만 동선의 요체는 성지순례였다.
 
‘혁명 혈통’을 내세워 셋째 아들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을 정당화하면서 일제 강압기의 중국 공산당과 김일성의 항일 연대,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간 내전(국·공 내전) 당시 김일성의 지원을 강조해 중국의 경제 지원을 얻어내려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버지의 업적과 궤적을 외교와 국내정치에 활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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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지린(吉林)성 지린시로 들어가며 방중을 개시한 김 위원장은 김일성이 1920년대 다녔던 위원(毓文)중학교와 학생운동 비밀회합을 연 장소라는 베이산(北山)공원을 잇따라 방문했다. 첫 일정이었다.
 
27일에는 북한이 주체사상의 진원지라고 선전하는 카륜마을이 인접한 창춘(長春)에서 후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29일 하얼빈(哈爾濱)으로 이동해 타이양다오(太陽島)의 동북항일연군 기념관을 찾았다.
 
동북항일연군은 1930년대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무장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은 30일 귀국길에도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牧丹江)을 찾아 동북항일연군 기념탑을 찾았다.
 
무단장은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박격포를 빼앗아 대승을 거뒀다고 하는 곳이다. 2000년 이래 여섯 번 이뤄진 그의 방중에서 이런 행보는 없었다. 대부분 산업시찰로 채워졌었다.

김정일은 27일 후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아버지의 업적을 강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이 “동북지방은 김일성 동지가 중국의 혁명가들과 인민들과 굳게 손잡고 20여 년의 혁명투쟁을 벌인 잊을 수 없는 고장”이라며 “김일성 수령 심중엔 동북의 정든 산야와 함께 싸운 중국 동지들에 대한 생각이 한시도 떠나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후 주석 주최 연회에서도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은 일찍이 김 주석이 중국 동지들과 피 어린 항일 혁명투쟁을 벌인 불멸의 발자취가 어려 있다”고 했다.

후 주석도 화답했다. “동북지역의 어디에나 김일성 주석 동지의 혁명 발자취가 역력히 어려 있다”며 “김 주석은 오랜 기간 투쟁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중국 혁명 승리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그러면서 대(代)를 이은 친선·협조 관계를 강조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이 아버지와 중국의 인연을 강조한 것은 북한과의 혈맹의식이 없는 중국의 신세대들에게 ‘중국만 북한을 도와준 게 아니라 북한도 과거 중국을 크게 도왔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강 전 장관은 “2008년 12월에 북한이 1945년 8월부터 50년 5월까지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내역을 기록한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란 책을 출판했다”며 “그해 한국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북한이 중국 측에 자신들의 지원 전력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며, 김정일은 이번 방북에서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자는 상하이 엑스포 ‘조선관’에도 진열돼 있다.

강 전 장관은 “책에 따르면 1945년 김일성이 무기와 탄약 10만 정을 중국에 내주고 북한 전역에서 광목(무명)을 징발해 보내주는 등 엄청난 대중국 지원을 했다” 고 설명했다./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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