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애 교수의 황장엽씨 사실혼과 자식설 소문에 대한 진상을 밝힘
- 도장산
- 2010-10-19 09:37:08
- 조회수 : 2,658
주선애 교수의 황장엽씨 사실혼과 자식설 소문에 대한 진상을 밝힘
주선애(장신대 명예교수)씨는 항장엽씨와 비슷한 나이로서 황장엽씨 살아 생전에 늙고 외로운 황장엽씨의 말동무가 되어
아주 막역한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황장엽씨의 자식이 있다는 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녀의 황장엽씨의 진정한 모습에 관한 증언을 들어 봅시다.
"그분은 살아 계실 때 시계처럼 살았어요. 꼭 아침 8시 반이면 제게 전화를 해요. 그날 8시 45분쯤 '어, 오늘 전화가 안 오네' 생각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제가 전화를 걸었죠. 그때 돌아가신 거예요. 다음날 8시 반에도, 습관이 돼서 시계를 쳐다봤어요. 제가 울고 있더라고요."
86세의 주선애(장신대 명예교수)씨는 소녀처럼 감상에 젖어들었다.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5년 이상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전화를 못 할 것 같으면 전날에 '내일은 내가 강연가야 돼요' 하며 이유를 밝혔어요."
―날마다 무슨 용건이 그렇게 있었을까요?
"내용 없는 말만 해요. '주 선생 건강하시오?' '예. 조반 잡수었어요?' '조금 했지' '거 많이 드세요'. …늘 이렇게 싱거웠어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도 이런 통화를 했어요."
―황장엽씨는 왜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연인 사이라도 날마다 전화하기 어려운데.
"제게 전화를 거는 게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주 선생 나도 아침마다 기도합니다'고 해요. 그분을 전도하려고 애썼던 나는 '정말이세요?' 하고 반색했지요. 그러자 '주 선생께 이렇게 전화하는 게 기도가 아니겠소'라고 해요.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변에서는 그녀를 황장엽씨의 '유일한 남쪽 친구', 심지어 '연인(戀人)'이라고 했다. 황씨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변함없는 우정과 배려는 쇠약해가는 저의 생명에 새로운 생명을 보태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은 '아가페'적 사랑의 완벽한 체현자만이 주실 수 있는 고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황장엽, 2003년 3월8일.'
―김대중 정부 시절 만났다면서요. 첫 만남이 어떻게 시작됐죠?
"2002년 6월인가요. 평양 정의여고 동창생들끼리 모였을 때 '황 선생이 같은 고향에서 왔으니 한 번 뵙자'는 말이 나왔어요. 동창 둘과 함께 그분이 토요일마다 나온다는 '탈북자동지회' 사무실로 찾아갔던 거죠. 그분이 '어릴 때 평양의 양촌(洋村)에서 놀았다'고 했어요. 양촌은 외국인과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지요. 제가 '저도 집이 그 근처라 양촌에서 놀았는데요'라고 했지요. 나이를 맞춰 보니 한 살 차였어요. 어쩌면 어렸을 때 같이 놀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순전히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황장엽씨를 만났다면 한 번 만난 걸로 됐지 않았나요?
"그런데 헤어지면서 '참 안 됐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국정원 내 안가(安家)에 계신다니까,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잡숫는 음식이 안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양사람들이 잘 먹는 만두와 콩비지 등을 만들어서 매주 갔어요. 수상한지 국정원에서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한 적도 있었어요."
―왜 그렇게 황장엽씨에게 지극정성을 쏟은 겁니까?
"북에 가족을 모두 버리고 내려왔는데도 여기서는 꼼짝 못하는 처지가 불쌍했으니까요. 하긴 나도 이상했어요. 내가 왜 이러는가.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생각이 계속 나고. 물론 남녀 간 연애는 아니지만. 그때는 제 남편도 다 살아있었어요. 그런데도 날마다 황 선생을 위해 기도했어요. 처음으로 그분을 전도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저는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만 했지(제자들로는 김동호 정태인 하용조 한인수 목사 등이 있음), 그전까지 개인 전도를 해본 적은 없었어요."
―황장엽씨의 '주체사상(인간중심철학)'은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요?
"그걸 알고 있었지만 '기적'을 믿었지요. 그분의 열살 위 누님이 기독교 신자였대요. '우리 누님은 내가 공산주의 책을 본다고 욕을 했는데 주 선생은 안 하네. 그런데 기도만으로는 안 돼요'라고 했어요. 평생 해온 주체사상을 쉽게 바꾸겠어요. 오히려 제게 자신의 철학을 설파해요. 제가 '선생님 책은 너무 어려워 모르겠다'고 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인도주의는 기독교와 똑같지 않소'라고 해요. 기본이 완전히 다른데도 말이에요."
―그런 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논쟁한다고 들을 분도 아니고. 그분도 '거창한 얘기는 하지 말고 우리끼리는 치킨이나 시켜먹고 지냅시다. 나는 더 이상 대통령도 장관도 만날 생각이 없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분에게는 안식처가 필요했을 겁니다.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온 분인데 힘들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주로 잡숫는 음식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분은 아침에 과일을 좀 드시고 오후 2시쯤 식사를 해요. 밥보다 고기를 좋아했고, 제일 좋아한 것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스테이크였어요. 평소 양은 적지만 그 음식점에 가면 큰 스테이크를 다 잡쉈어요. 하지만 체중이 43kg만 돼도 단식을 했어요. 몸무게를 41kg으로 지키려고 했어요(키는 약 158㎝)."
―그를 신(神)에게로 인도하려는 당초 계획은 실패한 셈이군요.
"하지만 그분은 '주 선생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내가 믿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직접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어떤 자리에서는 '하나님, 정의가 필요합니다. 북한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징벌을 받고 선량한 사람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황장엽씨가 교수님께 개인적인 감정을 표시하진 않았나요?
"만나서 얼마 안 됐는데 '주 선생 나와 형제 합시다'고 해요. 전 겁이 나서 대답을 못 했어요. 약간 친해진 뒤에는 '북한에서 주 선생을 만났다면 결혼했을 거요'라고 했어요. 제가 '예수님을 안 믿어 안 됐을 걸요'라고 받으니, 다른 자리에서 '주 선생은 예수로 꽉 찼어'라고 했대요. 또 한번은 수잔 숄티(디펜스포럼재단 대표)가 와서 몇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갔어요. 그 자리에서 황 선생이 '농담 한번 합시다. 러시아에서는 인사할 때 껴안기도 하는데 주 선생에게는 그걸 못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그걸 왜 못해요' 했지요. 그때부터 인사로 포옹을 했어요. 사람들 많이 오는 파티 자리에서는 귓속말로 '주 선생은 내 옆에 앉으라요'라고 해요. 그게 난 민망했어요."
"처음 만나고 이듬해인가, 황 선생의 생일이 가까워 오니까 탈북자들이 생일잔치 얘기를 꺼냈어요. '그런 거 안 한다…. 주 선생 집이라면 할지 몰라도.' 좀 느닷없다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받아들였어요. 가정의 따뜻한 정(情)을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생일잔치를 우리 집에서 했어요. 올해에는 황 선생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제 생일 파티를 열어줬어요."
―황장엽씨 같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솔직히 피곤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딱딱했죠. 저를 시험해보고 신경질을 부릴 때도 있었어요. 제가 '가을 단풍이 좋으니 소풍이나 갈까요' 하니, '나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하고 거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차츰 마음을 여니까 농담도 했어요. 우리는 경기도 양평으로 네 번이나 놀러 갔어요. 경호원 8명이 황 선생을 빙 둘러싸며 따라붙어요. 그러니 황 선생과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요. 그분은 늘 갇혀 있거나 경호원들에 의해 둘러싸여 제대로 세상을 본 적이 없어요. 북한을 나왔지만 북한에서 사는 것과 같았어요. 세상물정을 몰라 사소한 것까지 제게 부탁했어요. '동화책을 좋아한다'며 동화책을 사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노무현 정권 초기에 정치적으로도 어려웠지만 '여비서와 사실혼 관계이며 아들이 있다'는 소문까지 났어요. 당시 탈북자사무실에서 그분을 만난 뒤 나오려는데, 경호원이 '황 선생이 교수님을 찾는다'고 해요. 방으로 들어가니 그분이 칼을 들고 앉았어요. '나 할복자살 하겠다.' 그 광경에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쳤어요. '지도자가 뭐 이따위야.' 그 뒤로 저를 완전히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분은 허리띠에 접이칼을 차고 다녔어요."
그 사건 직후 황장엽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했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 소리.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보니, 벌써 새벽 3시 30분. 물론 이대로야 죽을 권리가 없지. 어떻게 나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길을 찾아야 한다. 황장엽, 2003년 4월 23일'
―말이 나온 김에, 여비서와 사실혼 관계이며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그런 관계를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2003년 방미 때 수행할 정도로 친했던 김미영씨(전 한동대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 여자는 마흔 살에 정보기관 모 간부의 애를 가졌다고 했다. 꼭 낳아야겠으니 내 아이인 것처럼 해달라고 해 허락한 것이다. 소문이 돌아 주위에서 내게 친자 확인 소송을 하라고 한다. 그러면 그 여자를 망가뜨리는 것이니 결코 하지 않겠다. 남한에서 내가 가장 잘한 것은 그 여자를 살려준 것이다.' 저는 모르지만 거짓말할 분은 아닐 거예요."
―황장엽씨 소유의 서울 논현동 건물(국정원 안가와 다름)이 그 여인에게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이분은 닭 치는 걸 보는 걸 좋아했어요. 닭을 치는 시골집으로 모셔가면 무심히 보면서 '저렇게 집 지어 닭 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해요. 그래서 '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했어요?' 하니, '다 줘버렸어. 내가 인격이 있지, 그깟 걸로 어떻게 다퉈'라고만 말했어요."
―황장엽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실제 접해 보니 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나요?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관계에 약해요. 좀 더 흉을 보자면 돈을 쓸 줄 몰라요. '그분의 주머니에 들어가면 나오는 일이 없다'고도 했어요. 방문한 양로원에서 다만 10만원이라도 내놓아야 하는데, 제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허물도 다 가려지는 게 민족을 품었잖아요. 애국심과 열정, 대의를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고난을 다 당했잖아요. 노무현 정권 초 우여곡절 끝에 미국을 방문하게 됐어요. 떠나기 직전 정부측 인사가 '혹시 미국에 망명하지는 않겠지요'라고 전화했어요. 그분은 '내가 두 번 망명하겠나. 여기가 내 조국인데 어딜 망명하겠느냐'며 화를 냈어요.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어요. "
―황장엽씨의 말 중에 무엇이 가장 기억에 삼삼한가요?
"그분은 일제때 동경 유학 후 국내로 들어와서는 노역을 했대요. 삼척 시멘트 광산에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그때 북한으로 가지 말고 남한으로 왔으면' 하고 제게 한탄했어요. 당시만 해도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간 게 아니라 고향이 거기에 있어 갔던 거지요."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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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애(장신대 명예교수)씨는 항장엽씨와 비슷한 나이로서 황장엽씨 살아 생전에 늙고 외로운 황장엽씨의 말동무가 되어
아주 막역한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황장엽씨의 자식이 있다는 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녀의 황장엽씨의 진정한 모습에 관한 증언을 들어 봅시다.
"그분은 살아 계실 때 시계처럼 살았어요. 꼭 아침 8시 반이면 제게 전화를 해요. 그날 8시 45분쯤 '어, 오늘 전화가 안 오네' 생각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제가 전화를 걸었죠. 그때 돌아가신 거예요. 다음날 8시 반에도, 습관이 돼서 시계를 쳐다봤어요. 제가 울고 있더라고요."
86세의 주선애(장신대 명예교수)씨는 소녀처럼 감상에 젖어들었다.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5년 이상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전화를 못 할 것 같으면 전날에 '내일은 내가 강연가야 돼요' 하며 이유를 밝혔어요."
―날마다 무슨 용건이 그렇게 있었을까요?
"내용 없는 말만 해요. '주 선생 건강하시오?' '예. 조반 잡수었어요?' '조금 했지' '거 많이 드세요'. …늘 이렇게 싱거웠어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도 이런 통화를 했어요."
―황장엽씨는 왜 그렇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연인 사이라도 날마다 전화하기 어려운데.
"제게 전화를 거는 게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주 선생 나도 아침마다 기도합니다'고 해요. 그분을 전도하려고 애썼던 나는 '정말이세요?' 하고 반색했지요. 그러자 '주 선생께 이렇게 전화하는 게 기도가 아니겠소'라고 해요.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변에서는 그녀를 황장엽씨의 '유일한 남쪽 친구', 심지어 '연인(戀人)'이라고 했다. 황씨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변함없는 우정과 배려는 쇠약해가는 저의 생명에 새로운 생명을 보태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은 '아가페'적 사랑의 완벽한 체현자만이 주실 수 있는 고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황장엽, 2003년 3월8일.'
- ▲ 주선애 교수는“황장엽 선생은 북한을 나왔으나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북한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2002년 6월인가요. 평양 정의여고 동창생들끼리 모였을 때 '황 선생이 같은 고향에서 왔으니 한 번 뵙자'는 말이 나왔어요. 동창 둘과 함께 그분이 토요일마다 나온다는 '탈북자동지회' 사무실로 찾아갔던 거죠. 그분이 '어릴 때 평양의 양촌(洋村)에서 놀았다'고 했어요. 양촌은 외국인과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지요. 제가 '저도 집이 그 근처라 양촌에서 놀았는데요'라고 했지요. 나이를 맞춰 보니 한 살 차였어요. 어쩌면 어렸을 때 같이 놀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순전히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황장엽씨를 만났다면 한 번 만난 걸로 됐지 않았나요?
"그런데 헤어지면서 '참 안 됐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국정원 내 안가(安家)에 계신다니까,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잡숫는 음식이 안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양사람들이 잘 먹는 만두와 콩비지 등을 만들어서 매주 갔어요. 수상한지 국정원에서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한 적도 있었어요."
―왜 그렇게 황장엽씨에게 지극정성을 쏟은 겁니까?
"북에 가족을 모두 버리고 내려왔는데도 여기서는 꼼짝 못하는 처지가 불쌍했으니까요. 하긴 나도 이상했어요. 내가 왜 이러는가.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생각이 계속 나고. 물론 남녀 간 연애는 아니지만. 그때는 제 남편도 다 살아있었어요. 그런데도 날마다 황 선생을 위해 기도했어요. 처음으로 그분을 전도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저는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만 했지(제자들로는 김동호 정태인 하용조 한인수 목사 등이 있음), 그전까지 개인 전도를 해본 적은 없었어요."
―황장엽씨의 '주체사상(인간중심철학)'은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요?
"그걸 알고 있었지만 '기적'을 믿었지요. 그분의 열살 위 누님이 기독교 신자였대요. '우리 누님은 내가 공산주의 책을 본다고 욕을 했는데 주 선생은 안 하네. 그런데 기도만으로는 안 돼요'라고 했어요. 평생 해온 주체사상을 쉽게 바꾸겠어요. 오히려 제게 자신의 철학을 설파해요. 제가 '선생님 책은 너무 어려워 모르겠다'고 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인도주의는 기독교와 똑같지 않소'라고 해요. 기본이 완전히 다른데도 말이에요."
―그런 문제로 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논쟁한다고 들을 분도 아니고. 그분도 '거창한 얘기는 하지 말고 우리끼리는 치킨이나 시켜먹고 지냅시다. 나는 더 이상 대통령도 장관도 만날 생각이 없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분에게는 안식처가 필요했을 겁니다.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온 분인데 힘들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주로 잡숫는 음식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분은 아침에 과일을 좀 드시고 오후 2시쯤 식사를 해요. 밥보다 고기를 좋아했고, 제일 좋아한 것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스테이크였어요. 평소 양은 적지만 그 음식점에 가면 큰 스테이크를 다 잡쉈어요. 하지만 체중이 43kg만 돼도 단식을 했어요. 몸무게를 41kg으로 지키려고 했어요(키는 약 158㎝)."
―그를 신(神)에게로 인도하려는 당초 계획은 실패한 셈이군요.
"하지만 그분은 '주 선생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내가 믿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직접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어떤 자리에서는 '하나님, 정의가 필요합니다. 북한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징벌을 받고 선량한 사람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황장엽씨가 교수님께 개인적인 감정을 표시하진 않았나요?
"만나서 얼마 안 됐는데 '주 선생 나와 형제 합시다'고 해요. 전 겁이 나서 대답을 못 했어요. 약간 친해진 뒤에는 '북한에서 주 선생을 만났다면 결혼했을 거요'라고 했어요. 제가 '예수님을 안 믿어 안 됐을 걸요'라고 받으니, 다른 자리에서 '주 선생은 예수로 꽉 찼어'라고 했대요. 또 한번은 수잔 숄티(디펜스포럼재단 대표)가 와서 몇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갔어요. 그 자리에서 황 선생이 '농담 한번 합시다. 러시아에서는 인사할 때 껴안기도 하는데 주 선생에게는 그걸 못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그걸 왜 못해요' 했지요. 그때부터 인사로 포옹을 했어요. 사람들 많이 오는 파티 자리에서는 귓속말로 '주 선생은 내 옆에 앉으라요'라고 해요. 그게 난 민망했어요."
- ▲ 황씨 생일 때 함께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
"처음 만나고 이듬해인가, 황 선생의 생일이 가까워 오니까 탈북자들이 생일잔치 얘기를 꺼냈어요. '그런 거 안 한다…. 주 선생 집이라면 할지 몰라도.' 좀 느닷없다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받아들였어요. 가정의 따뜻한 정(情)을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생일잔치를 우리 집에서 했어요. 올해에는 황 선생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제 생일 파티를 열어줬어요."
―황장엽씨 같은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솔직히 피곤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딱딱했죠. 저를 시험해보고 신경질을 부릴 때도 있었어요. 제가 '가을 단풍이 좋으니 소풍이나 갈까요' 하니, '나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하고 거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차츰 마음을 여니까 농담도 했어요. 우리는 경기도 양평으로 네 번이나 놀러 갔어요. 경호원 8명이 황 선생을 빙 둘러싸며 따라붙어요. 그러니 황 선생과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요. 그분은 늘 갇혀 있거나 경호원들에 의해 둘러싸여 제대로 세상을 본 적이 없어요. 북한을 나왔지만 북한에서 사는 것과 같았어요. 세상물정을 몰라 사소한 것까지 제게 부탁했어요. '동화책을 좋아한다'며 동화책을 사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노무현 정권 초기에 정치적으로도 어려웠지만 '여비서와 사실혼 관계이며 아들이 있다'는 소문까지 났어요. 당시 탈북자사무실에서 그분을 만난 뒤 나오려는데, 경호원이 '황 선생이 교수님을 찾는다'고 해요. 방으로 들어가니 그분이 칼을 들고 앉았어요. '나 할복자살 하겠다.' 그 광경에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쳤어요. '지도자가 뭐 이따위야.' 그 뒤로 저를 완전히 믿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분은 허리띠에 접이칼을 차고 다녔어요."
그 사건 직후 황장엽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했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 소리.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보니, 벌써 새벽 3시 30분. 물론 이대로야 죽을 권리가 없지. 어떻게 나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길을 찾아야 한다. 황장엽, 2003년 4월 23일'
―말이 나온 김에, 여비서와 사실혼 관계이며 아들이 있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그런 관계를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2003년 방미 때 수행할 정도로 친했던 김미영씨(전 한동대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 여자는 마흔 살에 정보기관 모 간부의 애를 가졌다고 했다. 꼭 낳아야겠으니 내 아이인 것처럼 해달라고 해 허락한 것이다. 소문이 돌아 주위에서 내게 친자 확인 소송을 하라고 한다. 그러면 그 여자를 망가뜨리는 것이니 결코 하지 않겠다. 남한에서 내가 가장 잘한 것은 그 여자를 살려준 것이다.' 저는 모르지만 거짓말할 분은 아닐 거예요."
―황장엽씨 소유의 서울 논현동 건물(국정원 안가와 다름)이 그 여인에게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이분은 닭 치는 걸 보는 걸 좋아했어요. 닭을 치는 시골집으로 모셔가면 무심히 보면서 '저렇게 집 지어 닭 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해요. 그래서 '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했어요?' 하니, '다 줘버렸어. 내가 인격이 있지, 그깟 걸로 어떻게 다퉈'라고만 말했어요."
―황장엽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실제 접해 보니 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나요?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관계에 약해요. 좀 더 흉을 보자면 돈을 쓸 줄 몰라요. '그분의 주머니에 들어가면 나오는 일이 없다'고도 했어요. 방문한 양로원에서 다만 10만원이라도 내놓아야 하는데, 제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허물도 다 가려지는 게 민족을 품었잖아요. 애국심과 열정, 대의를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고난을 다 당했잖아요. 노무현 정권 초 우여곡절 끝에 미국을 방문하게 됐어요. 떠나기 직전 정부측 인사가 '혹시 미국에 망명하지는 않겠지요'라고 전화했어요. 그분은 '내가 두 번 망명하겠나. 여기가 내 조국인데 어딜 망명하겠느냐'며 화를 냈어요.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어요. "
―황장엽씨의 말 중에 무엇이 가장 기억에 삼삼한가요?
"그분은 일제때 동경 유학 후 국내로 들어와서는 노역을 했대요. 삼척 시멘트 광산에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그때 북한으로 가지 말고 남한으로 왔으면' 하고 제게 한탄했어요. 당시만 해도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간 게 아니라 고향이 거기에 있어 갔던 거지요."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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