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 소문을 회고하며...
  • 탈북작가 림일
  • 2010-10-27 10: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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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황장엽 망명' 소문을 회고하며...



내가 ‘황장엽 망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쿠웨이트 주재 조선광복건설회사에서였다. 당시 3천여 명의 북한근로자들이 노동당외화벌이 차원에서 일을 하는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사막의 건설현장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황장엽이 남조선으로 튀었다”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자금 100만 달러를 들고 심복과 함께 달아났다” 이런 소문은 남한방송과 외신내용을 몰래들은 외국출장자들이나 중국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순식간에 북한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다.



자로 재고 시간으로 계산한 듯 얼마 후 이런 엉뚱한 소문도 돌았다. “김포공항에 내리는 민족반역자 황장엽을 대기하고 있던 대남전투원(특수훈련 된 남파간첩)들이 사살해버렸다” “아니다. 해외전투원(외국에 파견된 비밀정보요원)들이 먼저 손을 써서 비행기 안에서 독살했다”



여기서 “죽였다!”고 하는 두 번째 소문은 북한정보기관에서 정보원(일반주민으로 위장한 비밀통신원)들을 이용하여 돌리는 거짓소문이다. 노동당체제유지에 저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일단 흉흉해지는 민심을 수습하기위한 선차적인 대책이다.



북한 정보기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나도 ‘내가 가려는 서울이 과연 그런 곳일까? 대남전투원들이 득실거리는 살벌한 곳일까? 백주에 특정장소에서 특정인을 살해할 정도로 안보가 허술할까?’ 할 정도로 의구심을 품었으니 대부분의 일반주민들은 그 소문의 진상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황장엽 망명’ 소문에 대해 반신반의였던 내가 서울에 와서 황당하게 놀랐다. 대남전투원들의 저격에 황천객이 되었다던 황장엽 선생은 남한으로의 공식망명을 신청하고 중국 북경의 한국영사관에 은신 중이었다. 세계적인 뉴스거리로 첩보 및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전혀 보지 못한 사람은 북한인민들 뿐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강택민 중국주석에게 인도주의적인 협조를 부탁하였고 황장엽 선생은 마침내 추방형식으로 필리핀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들어왔다. 나는 정보기관에서 대북전문가들의 “독재정권 북한에 남은 시간은 얼마쯤으로 보는가?”하는 질문에 “너무나 많이 남았다”고 일축했다.



내 뒤로 20여 일 뒤에 입국한 황장엽 선생이 서울공항에서 가졌던 기자회견에서 “김정일 정권은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는 예상에 전문가들이 반신반의 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독재자 김정일은 잘 알지만 최하층 인민들의 의식과 실태는 정확히 모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좌파정부가 그의 진단을 허위로 만들었다.



‘조직생활’이란 이름하에 실핏줄처럼 이어진 주민감시체제에서 감시받는 사람보다 감시하는 사람이 더 많은 북한사회, 김정일의 사진만 구겨도 평생토록 감옥에 수감되는 그곳에서 2천만 주민 모두 죽어도 김정일에 대한 비판과 항거표출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서울에 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단호히 확신한다.



평범한 탈북자인 내가 외치는 것보다 황장엽 선생님이 하는 북한정권비판은 그 효력이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존경하는 분이었고 지난 14일 영결식장에서 그분을 떠나보내고 나서도 이렇게 아쉬운 것이다.



“황장엽이 내일 죽어도 오늘 살해하라!”는 북한의 지령에 “김정일이 내일 죽어도 오늘 단죄한다”는 강철의 의지로 사셨던 황장엽 선생님은 진정 북한민주화의 화신이고 귀감이셨다. 부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탈북작가   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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