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김정남은
  • 장진성
  • 2010-10-26 13: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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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의 개혁성향을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한 사람은 바로 나다. 그 전까지 우리 언론들은 그가 김정일의 눈 밖에 난 이유를 가짜여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강제 추방됐기 때문이라고만 설명 했었다. 내가 김정남을 북한에서 직접 만났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이 절정으로 육박하던 1996년 8월경이었다.


 

그때는 북한 정권이 체제의 마지막 자존심인 배급제 중단선언을 공식화하고, 더욱이 기관 자체로 식량을 해결하도록 지시한터라 시장이 기하급수로 늘어날 때였다. 북한의 1경제라고 할 수 있는 국가계획경제는 물론 군수산업 제2경제마저 붕괴되자 시장 확대는 더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돼 버렸다.


 

그러자 그동안 충성의 외화벌이 명복으로 외국에서만 이익을 찾던 권력기관들과 자본 세력이 자국 내로 시선을 돌리며 북한은 과거에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달러 우상주의가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범람하게 됐다. 비록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수입과 소비의 균형에 맞게 시장가격이란 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자 이를 주도하려는 세력도 등장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이른바 3경제로 자칭하던 28인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자본가들이었다. 장성택 형 장성우(수도방어사령부 사령관) 딸인 장미영, 오극렬의 아들 오세욱, 북한골프협회 회장 딸 정순영, 리을설(호위사령관) 국가원수의 맏사위 박철, 당조직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 리용철의 맏딸 리영란. 북한 마약판매총책인 당 대외연락부 평양류경회사 사장 손건하의 아내 리해순,


 

손건하의 형인 마카오 주재 손경철의 아들 손철, 북한에 6억달러를 송금한 조총련 산하 조선신용조합 회장의 손녀 리수남. 60년대부터 당 대외연락부 해외공작원으로 파견되어 프랑스에서 병원장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에게서 거액을 물려받아 갑부가 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속 은별무역관리국 국장 리병서, 리종옥 前 국가부주석의 아들 리찬, 등 그들은 말 그대로 권력과 돈을 양손에 쥔 북한 최고의 사조직이었다.


 

그들의 사실상 리더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속 은별무역관리국 국장 리병서였다. 그는 세계13차청년학생축전을 사회주의청년동맹이 주체했던 관계로 축제 중 상당한 이권을 챙겨 많은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 "3경제"는 매주 토요일마다 보통강호텔, 혹은 일본 요리사들이 와서 직접 요리를 하는 북한 최고의 일식집인 “은반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북한의 모든 외화를 장악한 김정일 외화관리실인 당38호실이 굳게 문을 닫은 탓에 사실상 국가차원의 외화유통이 중단된 무역공백이 그들에겐 행운적인 기회였다. 모임 때마다 시장가격들을 점검하던 그들에 의해 북한 시장의 쌀과 생필품 가격들이 오르고 내렸다. 이 "3경제"가 쌀을 수입할 시점이 시장에서 쌀 가격이 가장 쌀 때였고 그들의 쌀이 시장에 풀릴 때가 가장 비쌀 때였다.


 

마카오 주재 대외연락부 파견원 손경철의 아들 손철과 가까웠던 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모임에 몇 번 참가했던 적이 있다. 리병서는 아버지를 통해 이미 안면이 있었고 장미영 정순영, 리수남은 동창생이었던 관계로 멤버들은 불청객인 나를 무시 수준에서 기꺼이 용인해주었다.


 

어느 날 리병서가 뚱뚱한 남자를 동행하고 들어왔다.

우리가 그를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이건 제3경제가 아니라 완전 1경제구만”하는 큰 목청의 방자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모두가 허리가 숙여졌다. 김정남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가 나라 사정이 이 꼴이니 날보고 국가경제를 좀 추켜 세워보라고 했어요, 난 중국식 개혁개방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당신들이 그 주역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예요, 나는 우선 광명성총회사를 만들려고 해요, 그것은 자본주의식으로 말하면 대기업 그룹이예요, 당신들이 새끼 회사로 광명성총회사에 들어오면 가능하다고 봐요, 광명성총회사(북한에서 광명성이란 후계자를 의미)로부터 시작해서 당신들의 회사가 또 다른 그룹으로 퍼지면 그게 경제개혁이 아니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에 온 듯싶었다. 실제로 김정남은 일주일도 안 돼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1동 대성백화점 옆에 광명성총회사라는 간판을 걸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은 완공된 그 건물이 삼천리총회사로 탈바꿈했지만 그때는 리병서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지상으로 머리를 내미는 철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지경이었다.


 

이후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광명성총회사 기초공사와 함께 ";3경제";가 개혁경제의 구심점으로 구체화되면서 돈이 없는 나를 더는 인심으로 부를 근거도 사라진 것이다. 4달 후 리병서가 국가보위부에 체포됐다. 죄명은 안기부 “검은돈”을 받았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김정남의 개혁개방 계획의 중심에 놓였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김정남에게 “너는 경제보다 정치부터 알아야 한다.”며 국가보위부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위치에서 오히려 김정남은 폭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절대 체제가 오래 갈 수 없음을 통감하고 해외 방랑의 길을 선택했다. 최룡해가 경질된 것도 리병서 “반역죄”가 그 발단이었다. 리병서 취조과정에 최룡해에게 준 미화 350만불과 중앙청년동맹 협주단 여자들과의 섹스파티가 흘러나왔고, 이 사실을 안 김정일은 친동생처럼 여기던 그를 해임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리 언론이 김정남을 단순히 부귀영화를 쫒아 해외방랑을 일삼는 타락한 왕자로만 보는 것이 안쓰러워 2006년에 중앙일간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폐쇄정치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부정할 줄 알았던 왕자의 난인 셈이라고 말이다. 최근 그가 3대세습을 비난한 발언들을 보면 김정일의 운명도 이제는 올 때까지 오지 않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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