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김구를, 김정일을 DJ를 이용했다.
  • 성애
  • 2012-01-04 15:19:54
  • 조회수 : 1,513
모임에서 한 나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큰 논란이 불거졌다. 강문규 손봉호 이세중 박세일 이각범 씨 등 30여 명이 모여 대북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했지만 북한은 미사일 발사 뒤 핵을 갖겠다고 하고 있었다.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북한은 오히려 이산가족 상봉을 중단하고 관광객의 개성 시내 출입 금지 방침도 밝혔다.

나는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창립한 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념에 관계없이 남북의 갈등을 해소해야 이산가족과 기아에 시달리는 동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을 보면서 대북정책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모임을 통해 대북정책의 전환을 촉구했다.

“김일성이 김구 선생에게 그런 것처럼 김정일이 DJ를 이용했습니다. 인도적인 지원은 계속해야 하지만 이 도움이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국제기구를 통한 감시가 필요합니다. 대북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됩니다.”

한 참석자는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비판하면서 군을 앞세운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내 발언이 논란이 된 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 사무총장 등이 면담을 요청했다. 이 사무총장은 시민운동 단체를 거쳐 지난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구성된 ‘시민평화포럼’의 공동 대표를 맡은 데 이어 현재 민주통합당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스님, 우리는 북한을 돕는 단체이고, 북한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속았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래서는 앞으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과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의견입니다.”(이 사무총장)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북쪽의 심각한 인권 문제도 언급해야 합니다. 남쪽 역대 대통령의 잘잘못을 시시콜콜 모두 따지면서 북쪽에 대해 이 정도도 말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서로 같은 얘기가 반복됐다. 결국 이런 갈등이 불거진 뒤 10월 임기가 만료되면서 창립 때부터 10년간 공동대표와 이사장을 지냈던 그 단체를 떠났다.

지금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동포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평화통일을 위한 것이지 잘못된 체제를 지탱하고 군사적 도발을 돕기 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북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불교계 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한에 10여 차례 다녀왔다. 문화 교류를 통해 화해를 조성하고 신뢰를 회복해야만 국가와 사회의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특히 문화의 밑뿌리인 종교의 교류가 중요하다. 북한에는 60여 개의 전통 사찰이 보존돼 있고 스님도 300여 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불교 교류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995년 2월 조선불교도연맹 박태호 위원장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남북불교대표자 회담을 개최했다.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1997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에서는 남북 불교도 공동발원문을 박 위원장과 나의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1996년 ‘이웃과 민족을 위한 자비의 탁발 행사’를 개최한 데 이어 1997년에는 대북 민간 곡물지원이 허용된 뒤 민간 차원에서는 최초로 옥수수 1380t을 전달했다.

방북 중 그쪽 책임자와 얘기를 나누다 서로 얼굴을 붉힌 경험이 있다. 내가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늘리고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 책임자는 “전쟁은 미국 놈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초청하고, 만나주고, 악수해 주고 한 번 만났으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최근 북측에서는 유례없는 3대째 세습이 진행되고 있다. 착잡하다. 북측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애써 도움을 주고, 그것을 총알로 받아서는 안 된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