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는 장덕수 테러범인가?
  • 광복군
  • 2011-11-07 21: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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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장덕수 테러범인가?

해방정국에서 중도파와 남북 협상, 남북 교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백범 김구가 실은 중도주의나 협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면? 만약 김구가 일각의 주장처럼 테러리스트가 맞다면?
그보다 백범 김구가 갑자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직전에 숨겨졌던 행보가 드러났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알고 있던 소수에 의해서 쉬쉬하고 은폐되어왔던 사실이다. 사실은 내가 믿고 싶은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 김구는 어쩌면 진짜 무자비한 테러리스트였을 수 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6쪽.

2001년 9월에 발굴되 공개된 미군 정보장교인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는 장덕수의 암살범들이 백의사 단원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1946년 하반기부터 김구는 신익희와 멀어지면서 신익희의 조직인 백의사와도 멀어졌지만 김구가 한때 백의사와 인연을 맺었던 건 사실이므로 김구는 미군정에 의해 이래저래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몰리게 됐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
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68쪽.


현장에서 붙잡혔던 5인조는 모두 청년단체 단원으로 그 중 박광옥은 당시 미군정청 현직 경찰관이었지만 한국독립당 당원이었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역시 한독당의 당원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배후에서 사주했던 인물은 김구의 측근으로 국민회의 동원부장이자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인 김석황과 민주의원 비서장이며 한독당 간부인 조상항이었다.

김구는 미소공위 참가를 놓고 장덕수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김구 중심으로 추진된 한민당과 한독당 등 범우익 정당 통합에 김성수는 찬성했지만 장덕수는 당을 공짜로 임정에 상납하는 꼴이라며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런가 하면 김구는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 명제새를 가리켜 죽일 놈들이라고 지칭했다. 과연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현장에서 한독당원이 체포되고 김구와 장덕수간의 행적 등을 종합하여 수사한 결과 미군정은 백범 김구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임정 주석이라는 지위 때문에 체포하지 않고, 증인 자격으로 법정에 소환했던 것이다. 그리고 변호인까지 선임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미소공위를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운명 결정으로 본 그로써는 미소공위 역시 반대해야 되었으며, 미소 공위에서의 말싸움, 김구를 중심으로 범 우익정당 통합하는 것에 장덕수가 반대한 것 등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김구는 사실 그 전에 벌어진 송진우 암살과 여운형 암살의 주요 배후로도 지목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장덕수 암살 현장에서 한독당 당원들이 붙잡히고 그들을 사주했던 한독당의 간부들이 체포되자 백범 김구 역시 미군정청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어떻게든 법정에 끌려가지 않게 해달라고 했지만,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김구가 정말 장덕수를 암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도 있고,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장덕수를 한독당 측에서 암살해버렸는데 김구를 곱게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구는 예정대로 미합중국 대통령 명의의 출두명령서를 받고 미군정청 법정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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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암살의 증인(사실상의 범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소환된 백범 김구 (1948. 03)의 심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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