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광주사태를 선전할까?
- 시대정신
- 2011-02-01 08:20:15
- 조회수 : 2,265
북한은 왜 광주사태를 선전할까?
이슈메이커 안상수 대표께서 5.18 묘역 참배중 상석을 밟은 일이 있었습니다. 입이 가만히 있으니 이번에는 몸이 문제네요. 이 사건이 갑자기 5.18에 대해 떠오르게 하는데요. 5.18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은 간단합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정도 입니다. 약 일주일간의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5.18 민주화 운동을 정말 순수한 시민들만의 민주화 운동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불편한 의혹과 그 정황들이 있습니다. '북한 공작원 개입설' 입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5.18은 워낙에 성역화 되어있어서 조그만 의혹을 제기해도 비난을 받는것이 현실입니다. 단순히 대학생의 시위로 일어난 이사건은 그러나, 무기고탈취, 교도소습격으로 인해 북한군의 개입을 의심하게 됩니다. 지금도 순수 시민운동이라고 하기에는 논란거리가 있어 몇가지 정황을 써봅니다.
1. 1980년 5월 21일, 4시간대에 걸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서울지검 작성의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21일 아침 오전 8시, 시위대는 극비로 이루어지는 20사단의 이동계획을 미리 알고 광주 톨게이트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공격에 의해 14대의 지휘차량을 빼앗아 곧장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오전 9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왔다. 이들 600명은 장갑차 2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라고 의심했다. (서울지검 작성의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 지금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기고의 위치가 어디있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군 차량을 탈취 광주시 38개의 무기고를 4시간안에 털었다는 것은 시민들이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증언록 34쪽 하 3-6줄)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증언록 37쪽 하2-38쪽 1-2줄)
--> 이것은 탈북자들의 증언의 일부입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고를 탈취 무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시민들이 아닌 것으로 증언합니다.
몇가지 일화를 보면.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증언록 347쪽 5줄-349쪽 7줄)
다음은 교도소 습격에 관한 증언입니다.
위는 우리정부측 수사기록이고 아래는 탈북자들의 증언입니다.
5월 21일에 발생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서울지검의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검찰 9쪽, 안기부의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9-30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5.18의 213-214쪽)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증언록 83쪽 하1-5)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증언론 204쪽 하 7줄-205쪽 상1줄)
--> 5.18 에대한 북한 군인출신의 증언입니다. 저 일화가 진실인줄은 모르겠으나 실제로 북한에서는 매일 5.18을 생중계했고 주민들이 볼 수 있게하였으며 '남조선 괴뢰들을 몰아내고자하는 혁명봉기' 로 치켜세웠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공작원들이 없었다면. 누가 이미 사방이 우리군에 의해 통제된 광주에서 그 영상이 북한에 방송될 수 있게했을까요. 어떤 시민이 그렇게 장갑차를 능숙하게 몰 수 있었을까요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 시민군의 사망에 대한 수사기록입니다. 당시 공작원들은 우리군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한편 광주 시위를 살인정권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포장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사살하여(그들이 공작활동을 하던 중 그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시민들을 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시민들과 우리군 사이를 철저히 교란하였습니다. (우리군에 의해 사살된 사망자는 m-16 총알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69%의 총상자의 몸에서 칼빈소총 즉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알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시작은 대학생들의 민주운동 혹은 시위로 시작되있으나 신군부의 강압진압으로 인해 유혈사태가 로 번지자 북한이 개입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시작 이래로 4.19, 5,18, 6월항쟁 등 대한민국사에 획을 그은 민주화혁명과 운동이 있었습니다. 4.19와 6월항쟁은 대한민국 국민이 독재정권에 대항한 애국혁명이었지만 5.18만큼은 다시 재평가 되어야 합니다.
4.19와, 6월항쟁에 대해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한 자료는 없으나 5.18같은 경우 북한에서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광주의 분노' 라는 책을 출판, 민족자주, 반미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광주항쟁에 대해 책을 출판하면서 까지 선전하려했을까요
엄청난 희생으로 끝난 이 사건은 결국 정치인들이 이용하여 성역화 시키고 그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 하면 '반민주' 라는 낙인을 찍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사건으로 5.18 유공자 자리를 받은 '윤기권'은 1991년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겠다며 월북하였습니다. 비단 윤기권 뿐이겠습니까 북한군의 사주를 받고 지금도 5.18을 계기로 민주화열사라며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힘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5.18을 순수 민주화 운동으로 받아드리기에는 불순물이 너무나 많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무한전진에서 보내온 자료)
시민군(?)이 몰고 나온 탕크
이슈메이커 안상수 대표께서 5.18 묘역 참배중 상석을 밟은 일이 있었습니다. 입이 가만히 있으니 이번에는 몸이 문제네요. 이 사건이 갑자기 5.18에 대해 떠오르게 하는데요. 5.18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은 간단합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정도 입니다. 약 일주일간의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5.18 민주화 운동을 정말 순수한 시민들만의 민주화 운동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불편한 의혹과 그 정황들이 있습니다. '북한 공작원 개입설' 입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5.18은 워낙에 성역화 되어있어서 조그만 의혹을 제기해도 비난을 받는것이 현실입니다. 단순히 대학생의 시위로 일어난 이사건은 그러나, 무기고탈취, 교도소습격으로 인해 북한군의 개입을 의심하게 됩니다. 지금도 순수 시민운동이라고 하기에는 논란거리가 있어 몇가지 정황을 써봅니다.
1. 1980년 5월 21일, 4시간대에 걸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서울지검 작성의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21일 아침 오전 8시, 시위대는 극비로 이루어지는 20사단의 이동계획을 미리 알고 광주 톨게이트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공격에 의해 14대의 지휘차량을 빼앗아 곧장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오전 9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왔다. 이들 600명은 장갑차 2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라고 의심했다. (서울지검 작성의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 지금도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기고의 위치가 어디있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군 차량을 탈취 광주시 38개의 무기고를 4시간안에 털었다는 것은 시민들이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증언록 34쪽 하 3-6줄)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증언록 37쪽 하2-38쪽 1-2줄)
--> 이것은 탈북자들의 증언의 일부입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고를 탈취 무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시민들이 아닌 것으로 증언합니다.
몇가지 일화를 보면.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증언록 347쪽 5줄-349쪽 7줄)
다음은 교도소 습격에 관한 증언입니다.
위는 우리정부측 수사기록이고 아래는 탈북자들의 증언입니다.
5월 21일에 발생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서울지검의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검찰 9쪽, 안기부의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9-30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5.18의 213-214쪽)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증언록 83쪽 하1-5)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증언론 204쪽 하 7줄-205쪽 상1줄)
--> 5.18 에대한 북한 군인출신의 증언입니다. 저 일화가 진실인줄은 모르겠으나 실제로 북한에서는 매일 5.18을 생중계했고 주민들이 볼 수 있게하였으며 '남조선 괴뢰들을 몰아내고자하는 혁명봉기' 로 치켜세웠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공작원들이 없었다면. 누가 이미 사방이 우리군에 의해 통제된 광주에서 그 영상이 북한에 방송될 수 있게했을까요. 어떤 시민이 그렇게 장갑차를 능숙하게 몰 수 있었을까요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 시민군의 사망에 대한 수사기록입니다. 당시 공작원들은 우리군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한편 광주 시위를 살인정권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으로 포장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사살하여(그들이 공작활동을 하던 중 그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시민들을 주로 살해했다고 합니다) 시민들과 우리군 사이를 철저히 교란하였습니다. (우리군에 의해 사살된 사망자는 m-16 총알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69%의 총상자의 몸에서 칼빈소총 즉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알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시작은 대학생들의 민주운동 혹은 시위로 시작되있으나 신군부의 강압진압으로 인해 유혈사태가 로 번지자 북한이 개입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시작 이래로 4.19, 5,18, 6월항쟁 등 대한민국사에 획을 그은 민주화혁명과 운동이 있었습니다. 4.19와 6월항쟁은 대한민국 국민이 독재정권에 대항한 애국혁명이었지만 5.18만큼은 다시 재평가 되어야 합니다.
4.19와, 6월항쟁에 대해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한 자료는 없으나 5.18같은 경우 북한에서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광주의 분노' 라는 책을 출판, 민족자주, 반미 투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광주항쟁에 대해 책을 출판하면서 까지 선전하려했을까요
엄청난 희생으로 끝난 이 사건은 결국 정치인들이 이용하여 성역화 시키고 그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 하면 '반민주' 라는 낙인을 찍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사건으로 5.18 유공자 자리를 받은 '윤기권'은 1991년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겠다며 월북하였습니다. 비단 윤기권 뿐이겠습니까 북한군의 사주를 받고 지금도 5.18을 계기로 민주화열사라며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힘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5.18을 순수 민주화 운동으로 받아드리기에는 불순물이 너무나 많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무한전진에서 보내온 자료)
시민군(?)이 몰고 나온 탕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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