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민위
- 2025-03-08 07: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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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지배하던 공산 진영의 맹주 스탈린은 늙어가면서 의심만 늘었지 총기(聰氣)는 잃어가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덕에 세계 최강국 권좌에 오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전임자에 견줘 개인적 매력, 전략적 유연성, 세계문제에 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 자리에 오른 그는 루스벨트가 전적으로 관여한 대외문제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외교 문외한이었다.
중국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을 가까스로 몰아내고 막 집권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한국보단 대만 문제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 하면서도 미국과 소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남과 북에서 각각 정적들을 제거하고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골몰했다.
한국을 둘러싼 주변국 정상과 한국 내 정치인들의 셈법은 이처럼 저마다 달랐고, 나름대로 복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 한반도 상황은 어디까지나 변방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에 불과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출간된 '냉전'(서해문집)은 냉전의 관점에서 20세기 역사를 정리한 두꺼운 역사서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미국 예일대 역사학·글로벌문제 담당 교수는 식민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1890년대부터 1991년 소련의 해체까지 100년의 역사를 냉전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저자는 냉전을 "미국과 러시아가 점차 국제적 사명감을 갖춘 강력한 제국으로 전환한 과정"이자 "자본주의와 그 비판자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첨예화한 과정"으로 간주한다.
책에 따르면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와 합의해 통일과 총선거를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한반도 분할이 굳어진 건 "이승만과 김일성이 자기의 통치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계획에도 완강히 동의하지 않았고, 1940년대 말 다른 곳에서 냉전이 격화됐기 때문"이었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모두 전쟁을 원했지만, 소련과 미국은 전혀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 1948년 말까지 38선 곳곳에서 남북의 잦은 충돌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미·소 모두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소련은 중국과 유럽의 공산화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씩 변해갔다.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를 몰아내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이 아시아 대륙 본토에 개입하길 꺼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장제스에게 보급품 등 물적 지원을 했지만, 군대를 파견하진 않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집중한 베를린 봉쇄 조치(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인 물자공급 봉쇄 조치)가 미국과 영국이 원조에 나서면서 1년 만에 물거품이 돼 버리자 낙담한 스탈린은 아시아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북한과 남한의 힘의 균형이 공산당에 유리하다'는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의 보고가 스탈린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1950년 6월에 진행할 구체적인 남한 공격 방안을 2~3개가량 제출했고, 스탈린은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공격 계획은 소련인이 주로 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벌인 고도의 기동전이 이들의 기본 전술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도 베이징도 워싱턴의 의도를 오판했다. 미국은 전쟁 패배 후 일본에서 득세하는 좌파를 물리치고 워싱턴과 지속적인 동맹을 형성할 수 있는 일본 내 자유주의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반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한반도에 입지를 마련하면 중국이 공산당에 완전히 넘어가더라도 아시아 본토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고, 미국이 일본을 방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어 한반도는 일본 못지않게 중요했던 냉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또한 1940년대 말부터 워싱턴 정가에 들이닥친 매카시즘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매카시 상원의원과 훗날 대통령이 되는 닉슨 상원의원은 정부가 공산주의에 물렁물렁한 태도를 보인다고 지속해서 공격했다. 야당인 공화당의 맹폭 속에 트루먼의 국내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오자 트루먼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한층 더 축소하고 지구 차원에서 미국과 동맹 세력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벌인 전면적인 침략사건"으로 판단하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몇 주 만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한 김일성의 판단과는 달리, 엎치락뒤치락하는 비등한 힘겨루기 속에 전쟁은 3년을 끌고 갔고, 한반도는 황무지가 됐다.
"(한국전쟁은) 관련한 모든 나라에 쓸모없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남북한 자체에 미친 영향은 더욱 나빴다.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350만명이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한국인에게 전쟁은 민족 재앙이었고, 전쟁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며, 그 비참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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