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100년 흔적
  • 관리자
  • 2012-04-16 09: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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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일성의 100년 흔적

 

북한의 수도 평양은 고 김일성의 성지나 다름없다. 시내중심부에서 서남방향 약 12km 떨어진 곳에 ‘만경대고향집’으로 불리는 그의 생가가 있다. 100년 전 김일성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ㄷ자형 모양의 초가집이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7살 때 3·1운동 시위선두에서 어른들과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친 김일성은 9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중국 길림성 림강에 나온다. 12~14세까지 고향인 평양에 와서 공부를 했고 대부분 중국과 소련(지금의 러시아)에서 청년 및 항일운동을 하였다. 그가 20살에 창군한 조선인민혁명군을 계승한 지금의 ‘조선인민군’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50명의 인원과 소련군함을 타고 9월 19일 원산에 상륙한 김일성이 입었던 군복에는 소련군 대위계급장이 달렸다. 그로부터 4일 뒤 평양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개시하며 10월 10일 지금의 ‘조선노동당’을 창당하고 4일 뒤 평양시민들 앞에서 개선인사를 하였다.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전권을 행사한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한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9월 2일 임시헌법을 공표며 9월 9일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설립한다.

근대 우리 민족사와 한반도에 끼친 김일성의 가장 큰 죄과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오래전부터 치밀한 계획 하에 소련과 중국의 군정당국자들과 밀담을 마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으로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친 기습남침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전면전으로 확전되었다.

37개월간 진행된 이 전쟁에서 남과 북의 군인 민간인 합쳐 모두 43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0만 명의 고아와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평화로운 우리네 일터와 삶의 보금자리를 송두리째 부셔버린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비로써 포성이 멎었다. 전체 한반도를 통치하려던 김일성의 야망은 전패로 끝났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김일성은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올인한다. 이때 그가 낸 아이디어가 ‘천리마운동’으로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경제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후로 생겨난 ‘평양속도 창조운동’,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등 각종 노동열의고취 캠페인은 결국 주민들을 잡생각 못하게 시키는 뺑뺑이 훈련이었고 또한 자신의 외화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강제노동이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잔인하고 영악한 독재자여서 그랬을까? 김일성은 1958년에 개인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국가의 소유로 만든 ‘농촌협동화’를 완성한다. 조상의 피와 땀이 밴 땅을 잃은 농민들은 무력한 존재가 되어 김일성이 주는 배급 쌀을 받아먹는 평등한 노예가 되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김일성은 1968년 1월 23일 원산부근의 공해상에서 작전 중인 미해군의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공화국의 영해를 침입하였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 이라고 호령한다. 이를 빌미로 10년간 인민군복무제를 도입하고 유사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일부 평양시민들을 농촌으로 이주시켰는데 본질에 있어서 자신에게 충성심이 부족한 미운 사람들을 골라서 추방한 것이다.

또한 이즈음에 ‘혁명무력의 사상투쟁’ 이라는 명분으로 군 수뇌부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하였다. 지난날 동지였지만 자신의 독재체제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김창봉, 허봉학, 김광협 등 수십 명의 군 고위 장성과 당 간부를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비공개로 총살하였다. 위대한 수령의 강철 같은 주먹맛을 톡톡히 보여준 김일성은 절대적인 1인 독재체제를 확고히 굳혔다.

60대 후반에 들어선 김일성은 세계를 깜작 놀랄 만한 거사를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1980년 노동당6차대회에서 아들 김정일을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선포 한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의 분단은 긴 터널로 빠져들어 갔다.

속담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고, 아들 김정일도 국가경제발전과 주민들의 생활향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통치기간 중점적으로 한 일은 전국 도처에 아버지 동상과 기념관, 혁명박물관을 세운 것이다. 부친의 건강만을 전담하는 국가기구를 만들었고 전국 도처에 수십억 달러를 들여 초호화 전용별장을 지었다.

김일성은 더 없이 만족했고 어느덧 70대의 노인이 되었다. 국내의 모든 일은 아들이 맡았고 자기는 외국의 정상 및 대표단 접견과 해외유람으로 세월을 보냈다. 세계적인 건강식품과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예술인들의 문화공연을 보았으니 아들 잘 둔덕에 노후보장을 확실히 받은 셈이다.

80살의 고령인 김일성이 노망이 들었는지 세상을 웃긴 적도 있었다. 아들 김정일의 50회 생일에 즈음하여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 덧 쉰돌인가 /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가 우러르네.” 라는 내용의 헌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에 아버지가 자식을 칭송한 사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국의 최고통치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린 김일성이다. “부디 만수무강하시라.”는 인민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도 인간인지라 신이 주신 운명의 시간을 비켜가지 못하고 1994년 7월 8일 평안북도 향산군에 있는 묘향산별장에서 82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평양시 미암동의 금수산태양궁전(생전 김일성 집무실)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보면서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은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물이 북한의 모든 공공기관 장소에 걸려 있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이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변화는 엽기적인 행위뿐이다.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예전의 ‘사회주의헌법’을 ‘김일성헌법’으로 바꾸었다. 이를 보면 “공화국은 김일성의 사상을 구현한 조국이다...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 조국통일의 구성, 위대한 정치가이다... 국가와 인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모시고 그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다...”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이게 과연 일국의 헌법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한 인간에 대한 개인숭배도 어느 정도지... 세상에 이런 괴이한 나라가 또 있을까?

김일성 사후 그를 우상화하는 건축물이 우후죽순 마냥 솟아났다. 도시와 거리 곳곳에 영생탑(김일성은 영원하다는 내용의 구호를 새긴 조형물)과 대형 태양상(김일성 영정사진)이 생겨났다. 이 정도가 끝이 아니다. 2009년 4월 헌법 개정을 통해 ‘김일성 민족’ 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2010년 9월 28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는 당규 개정을 통해 ‘김일성 조선’ ‘김일성 동지의 당’ 이란 이름이 나왔다. 이쯤 되면 북한은 정확히 ‘김일성 개인공화국’이 분명하다.

인민의 피땀으로 이 땅의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고 죽어서도 신처럼 받들리는 독재자 김일성이다. 우리 민족에 없었으면 좋았을 희세의 악인 그가 이 땅에 100년간 남긴 유산은 가난하게 찌든 나라와 굶주리는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물려준 잔인한 독재정권이 전부이다.

 

- 림일 탈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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