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21-06-28 07: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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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상대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국제 관계도 다를 게 없다. 모든 나라가 동맹국·경쟁국·적대국과 등을 맞대고 부대끼며 산다. 상대 국가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워야 원활한 관계 정립이 가능하다. 상대의 마음을 여는 첫 열쇠가 말이고 그 토대 위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신용(信用)을 쌓아간다.
국내 정치에서 충성심이 돈의 역할을 한다면 국제 관계에서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 지도자의 신용이다. 지도자의 신용이 곧 그 나라의 신용이다. 신용이 든든한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는 세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고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운(運)이 있는 나라였다.
국가 관계에서 경제 실력은 기초 체력과 같다. 기초 체력을 다져야 할 때 기초 체력 양성에 전력을 기울인 대통령이 있었다. 냉전(冷戰)의 벽이 허물어지던 때를 놓치지 않고 중국·소련과 국교(國交)를 튼 대통령도 있었다. 몇 걸음 늦었더라면 중국 시장에서 한국 위치는 지금만 하기 어려웠다.
일본과의 관계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한국 드라마와 K팝 등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 무대를 주름잡는 모습을 보는 데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국제 관계에서 상대의 마음을 열고 신용을 얻는 열쇠는 언행일치(言行一致)다. 상대국이 어떤 나라냐에 따라 열쇠 모양도 달라진다. 동맹국을 여는 열쇠로 적대국의 문을 따려 하면 화(禍)를 입는다. 뼈 없이 흐물흐물한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비치는 것만은 절대 피해야 한다. 동맹국은 그런 상대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적대국은 그런 상대의 존재 자체를 업신여긴다. 국제 사회에선 강단(剛斷) 있는 지도자가 끊는 보증수표가 신용을 얻는다.
국가 간 관계는 정부 대 정부 사이의 관계가 있고 국민과 국민과의 관계도 있다. 정부 사이 관계가 원활하면 국민과 국민 사이에도 우호(友好)의 정서가 번져간다. 역으로 국민 사이의 관계가 깊어지면 정부와 정부 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능란한 지도자는 상대국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동시에 얻기도 한다.
1978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 방문에서 두 과녁을 한꺼번에 뚫었다. 일본 측이 떨떠름해하는데도 록히드 뇌물 스캔들로 가택연금 상태에서 검찰 수사를 받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찾아갔다. 지금 어려운 처지지만 중·일 관계 정상화의 우물을 팠던 다나카에게 감사의 마음은 전해야겠다는 것이다.
이 고집으로 일본 정계에서 의리(義理)를 저버리지 않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제철소 건설에 경제 차관과 기술을 제공한 신일본제철을 방문해선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중국의 선생님입니다. 제자를 잘 지도해 줘야 합니다. 중국 제철소가 잘못되면 중국 사람들이 선생님 탓을 할지 모릅니다.” 이 한마디로 일본 국민들로부터 ‘겸손한 지도자’라는 호감을 샀다. 시진핑(習近平)과는 차원과 격(格)이 달랐다.
국가 지도자는 어떤 경우에도 임시변통(臨時變通)으로 곧 거짓말로 판명될 말을 해선 안 된다. 국제정치학자 미어샤이머는 국내 정치에서 거짓말을 일삼던 지도자도 국제 관계 영역에선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동맹국과 적대국이 동시에 그 발언의 진위(眞僞)를 검증하기에 거짓말로 오래 버텨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매우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강한 결단력과 국제 감각이 있다’고 했다. 김정은에 대한 미국의 신용을 높여 미·북 직접 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는 듯하다.
한국과 북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미국 국민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은 기억하고 있다. 호텔 복도의 정치 선전 포스터를 뗐다 해서 체제 전복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식물인간이 돼 미국으로 송환되는 모습을 TV 중계로 지켜봤다.
웜비어는 송환 6일 만에 죽었다. 대통령 의도대로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의 김정은에 대한 신용이 높아졌을까. 아마 대통령의 평판만 떨어뜨렸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 마음은 흑색선전·선심 공세 때로는 거짓말로 얻을 수도 있다. 선거를 8개월 앞두고 벌써 흙탕물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다음에도 국내 정치에서 하던 습관대로 세계를 만만하게 보는 우물 안 대통령을 뽑으면 나라가 정말 위태로워질 것이다.
강천석 조선일보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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