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망으로 점철된 김정일 생애와 백두혈통 ‘날조’
  • 관리자
  • 2022-02-22 07: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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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월 16일 “김정일 탄생 80돌 경축 중앙보고대회가 2월 15일 혁명의 성지 삼지연시에 높이 모신 위대한 장군님의 동상 앞에서 진행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를 비롯해 조용원(당 중앙위 조직비서), 김덕훈(내각 총리), 리일환(당 비서), 김재룡(조직지도부장), 김영철(통일전선부장), 정경택(국가보위상), 오일정(군정지도부장), 허철만(간부부장), 박태덕(규율조사부장), 김형식(법무부장), 박명순(경공업부장), 리철만(농업부장), 김성남(국제부장), 전현철·양승호(이상 부총리), 리선권(외무상), 리태섭(사회안전상), 우상철(중앙검찰소장) 등 당·정 간부들과 양강도 지역 주민들이 참가했다.

리일환 당 비서는 이날 보고에서 “장군님(김정일)께서 헤쳐가신 선군 장정의 피어린 길에서는 사탕 알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총알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후대들을 위해서라도 우선 사회주의를 지키고 봐야 한다는 신념의 메아리가 울리였으며 그 자욱자욱을 따라 무적 필승의 강군이 자라나고 조선노동당의 혁명공업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여났다”라고 밝혔다. 또 “이 하늘 아래 이 조선은 백두의 혈통을 받들어야만 살고 백두의 붉은기 아래서만 강해지고 부흥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이번에 김정일 80회 생일을 맞아 삼지연에서 보고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른바 ‘백두혈통 시발지(始發地)’에서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김정일의 위대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한편 대(代)를 이은 충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출생지 조작으로 페이스오프(face off)를 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자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주민의 극한 고통을 디딤돌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한 마디로 김정일의 생애는 기망(欺罔)과 가정(苛政)으로 점철된 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씩 짚어 본다.

백두혈통 날조

북한 선전 매체들은 삼지연에 소재한 백두산밀영 귀틀집을 김정일 출생지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 보면, 김정일의 실제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임이 분명하다.

첫째, 소련은 1942년 9월 ‘제88 독립저격여단’을 창설하고 동북 항일연군 제2로 군장 주보중(周保中)을 여단장, 조선인과 중국인 빨치산 지휘관들을 예하 각급 부대장에 임명하였다. 주로 조선인으로 구성된 ‘88 여단’의 제1대대는 김일성이 대대장, 안길이 정치담당 부대대장을 맡았다. 이 사실에서 김일성은 늦어도 1942년 9월경에는 소련에 있었다는 것이며, 당시의 교통과 통신 사정을 고려하면 그 시기는 훨씬 앞당겨질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김정일 생후 6개월 미만인 무렵으로, 그야말로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젖먹이를 안고 장거리를 이동했는지에 의문이 든다. 더욱이 김일성은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 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궤멸 위기에 처하자, 이들과 함께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소련 정부와 일본군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황장엽 전(前) 당 비서의 증언이다. 황 비서는 백두 밀영이 김정일 고향집이 된 경위에 대해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김정일이 태어난 백두산의 밀영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백두산 일대를 뒤졌지만 애초에 없던 밀영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도 적당하고 위치도 그럴듯한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라고 증언했다. 황 비서의 이 같은 주장은 북한 교과서의 기술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외에도, ‘자신이 김정일의 탯줄을 잘랐다’라고 한 러시아 조산원 진술과 ‘김정숙의 젖이 모자라 김정일에게 젖을 먹였다’라는 88정찰여단 여성 대원(이재덕 씨)의 증언은 김정일이 백두산밀영이 아닌 소련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 김정일 본인도 1960년 7월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이제 내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인)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한 김정일은, 김일성에 의해 후계자로 책봉된 이후 출생지를 백두산밀영 귀틀집으로 조작하는 한편 김일성 지휘 구호와 빨치산 대원들의 전투 구호를 새긴 구호 나무 등을 소품으로 등장시켜 ‘항일혁명 역사의 DNA를 지닌 백두혈통’으로 분장하였다. 즉, 백두산밀영과 이른바 ‘김정일 고향집’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대부분이 후일에 과장·날조됐듯이-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날조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정일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에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절대 권력을 –모든 권력의 원천인 주민 동의 없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무늬만 사회주의일 뿐 준(準) 왕조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권력 유지에만 몰두한 통치 행태

김일성 사망(1994.7.8)으로 김정일이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북한 경제는 허울만 그럴듯한 자력갱생(自力更生)이 지닌 근본적인 원인에 더하여 중소로부터의 지원 감소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특히 배급 체계가 마비되면서 주민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식량난의 고통에 빠져들면서 시작되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 지도자가 유일하게 취한 조치는 주민들이 각자도생하도록 장마당을 허용한 것뿐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주민들의 참혹한 상황을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김씨 일가의 우상화와 함께 ‘선군정치’로 포장된 군사력 증강에만 재원을 투입하였다.

먼저 우상화 작업의 대표적인 사례는 다름 아닌 금수산기념궁전(錦繡山記念宮殿) 건설이다. 김일성 사망 1주기인 1995년 7월 8일에 개관한 금수산기념궁전(2012년 김정일 70회 생일에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은 김정일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거주하던 금수산의사당(일명 주석궁)을 그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개조한 것으로, 궁전 앞에는 김일성 부자의 생일을 상징하는 폭 415m, 길이 216m의 광장을 조성하였다. 금수산기념궁전은 개관 이후, 김일성·김정일 생일이나 기일 등에 북한 주요 인물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이나 외국인들도 참배하는 ‘우상화의 지성소(至聖所)’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투입된 비용이 약 9억 달러(추정)에 이른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참상은 내버려 둔 채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망자(亡者)를 안치하는 시설에 엄청난 재화를 낭비한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체제를 만든 독재자를 위해 지구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분묘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북한 권력자의 본성이다. 희대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중국 은(殷)의 마지막 왕 제신(帝辛)이 백성의 재산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녹대(鹿臺)를 지었다는 고사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한편 김정일=선군정치라는 등식이 성립하듯,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에서 탈상까지의 3년간을 제외하고는 통치 기간 내내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몰두하였다. 대포동 1호 발사를 비롯해 장사정포 등 신형무기를 개발에 주력하는 한편 쉴 새 없이 군부대를 점검하면서 전비 태세를 독려하였다. 선군정치의 ‘끝판왕’ 적 결과물이 「9·19 공동성명」이라는 약속과 국제사회의 우려를 무시하고 2차례에 걸쳐 강행한 핵실험(2006.10.9., 2009.5.25.)이다.

또 주민들에게는 “조국 보위는 공민의 의무이며 군사는 국사(國事) 중의 국사라는 자각을 깊이 가지고 인민군대 원호에 앞장설 것”을 강요하여,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주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였다.

김정일은 군사력 증강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제1차 연평해전(1999.6), 천안함 폭침(2010.3), 연평도 포격(2010.11) 등의 도발로 한반도 정세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김정은이 이처럼 ‘선군정치’를 내세워 군사력 강화에 진력한 것은 ‘있지도 않은 미제(美帝)의 전쟁 도발에 대비한다’라는 구실을 내세워 주민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대한민국으로의 흡수통일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서,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였다고 하겠다.

이처럼 김정일은 날조된 이력으로 북한 주민을 기망하고, 권좌에 올라서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가혹한 통치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기망과 가정(苛政)으로 점철된 생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과 그에 빌붙어 살아가는 무리)에 의해 ‘위대한 수령’이라는 칭송을 받는 광경을 보면, 그야말로 “삶은 소 대가리가 웃다가 꾸러미(소 주둥이에 씌우는 망) 터지겠다”라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공자는 일찍이 정자정야(政者正也,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출신부터 조작·왜곡해서 권좌에 오른 김정일에게 올바른 정치를 기대한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연목구어였을지도 모른다.

                                              정창열 북한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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