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통 흔든 김일성, 꼬리 치는 김정은
  • 관리자
  • 2021-07-15 07: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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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과시에 북-중 ‘밀월’로 맞불
北 비핵화 없는 연명외교 오래 못 간다
이철희 논설위원
1961년 6월 말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기 사흘 전에야 중국 측에 방소 일정을 통보하며 그 목적은 ‘(북-소) 군사동맹조약 체결이 핵심’이라고 알렸다. 중국은 급박하게 움직였다. 우리와도 조약을 맺자며 서둘러 방중 초청장을 보냈고, 북-소 조약을 토대로 만든 조약문을 지도부에 회람하랴, 대대적인 환영행사도 준비하랴 분주했다. 김일성이 북-소 조약 체결 닷새 만에 북-중 우호조약까지 얻어낸 데는 이런 교묘한 ‘등거리 외교’가 있었다.

두 조약은 모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상대방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즉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군사적 맹약을 담았다. 차이가 있다면 북-소 조약이 10년 유효기간에 이후 5년마다 연장하도록 한 반면, 북-중 조약은 ‘쌍방 간 수정 또는 폐지 합의가 없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한 점이다. 중국이 소련보다 강한 보장을 해준 것은 소련과의 격한 갈등 속에 북한을 끌어안으려는 구애의 산물이었다.

김일성은 1960년대 초 공산권 내부의 균열을 십분 활용했다. 특히 사회주의 맹주 소련에 비해 고립된 처지였던 중국으로부터는 막대한 경제원조는 물론 유리한 국경조약까지 얻어냈다. 약소국이지만 강대국 사이에 경쟁을 부추기며 주도권을 쥐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尾巴搖狗·미파요구) 외교’의 결과였다.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과 개혁개방, 탈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그런 북한의 외교적 기교는 쉽게 통하지 않게 됐다. 7월 11일로 체결 60년이 된 북-중 우호조약도 중국 내에선 오래전부터 사문화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미중이 패권 대결로 치닫는 요즘, 죽었던 ‘북-중 혈맹’이 새삼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북-중 밀착이 가시화된 것은 5월 말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였다. 한미가 ‘동맹 업그레이드’를 과시한 지 닷새 만에 중국 외교부장은 북한 대사를 만나 ‘우호조약 60주년 기념활동’ 개시 의사를 밝혔다. 이후 양국의 기고문 교차 게재, 평양 기념연회 개최, 김정은 시진핑의 친서 교환이 이어졌다. 한미 동맹 강화에 맞선 북-중 동맹의 부활이었다.

한 달 가까이 모습을 감췄던 김정은이 기다렸다는 듯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다. 6월 4일 당 정치국 회의를 시작으로 중앙군사위 확대회의, 중앙위 전원회의, 정치국 확대회의를 잇달아 주재했다. 부쩍 살이 빠져 때꾼해진 눈으로 간부들을 노려보며 대대적인 문책인사도 단행했다. 북-중 화물운송 재개를 위한 방역장 건설이 지연되자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한다. 비빌 언덕이라곤 중국밖에 없는 김정은의 조바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전략적 지위와 능동적 역할을 높여 유리한 외부환경을 주동적으로 만들겠다”며 미중 대결구도에서 몸값을 높이겠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미국을 향해 “대화도 대결도 준비하겠다”며 넌지시 유화 제스처도 보였다. ‘대화 메시지’라는 해석에 여동생을 내세워 부인했지만 그건 중국의 지원부터 받고 나서 보자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게 북한은 비핵화를 외면하면서 당분간 중국에 기대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마냥 북한을 챙길 수는 없다.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방관하지 않겠지만 핵장난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외교를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김일성이 외친 ‘자주외교’ ‘자력갱생’도 기실 줄타기용 허울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들 손자에게 물려준 것도 핵을 껴안고 굶주리는 나라일 뿐이다.

                                 동아일보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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