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10-07-16 10:32:33
- 조회수 : 3,037
(설화: 여) 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음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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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오늘은 전 시간에 이어 제8화 “요덕의 철조망 속으로”를 들으시겠습니다.
10월 초였지만 그곳 함경남도는 겨울처럼 추운 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망을 느낀 터라 더 추웠을지도 모른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금야려관에 트럭이 도착했고 트럭을 타고 온 또 다른 군관이 이호춘에게 경례를 붙이더니 두툼한 서류를 넘겨받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시로서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무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작자였다.
남: 모두 몇이야?
여2: 일곱명이요.
남: 네가 김영순이야?
여2: 네...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남: 그런건 몰라두 돼.
여1: 이보라구, 젊은 량반. 이 늙은이가 궁금한건 우리가 이젠 평양에 다시 못가는가 하는거예요.
남: 이보라구, 젊은 량반? 하...이눔의 할망구가 정신이 없구만, 정신이.
여2: 우리 어머니가 년세가 많아서 그러니 량해 좀 하시라요. 그런데 저...편지 같은 건 할 수 있나요?
남: (갑자기 어조를 바꾼다)편지? 로동당의 해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는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말이야. 거, 지역은 말 할 수 없고, 그냥 따라 오기만 하면 돼!
여2: (입속말로) 그래 우리나라 어디나 로동당의 해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 참고 견디는 거야. (음악)
그러는 나를 향해 낮선 군관은 가족과 함께 트럭에 어서 오르라고 독촉을 해 댔다. 올망졸망 철부지들과 늙은 부모님들, 그리고 막내를 들쳐 업은 내가 차에 오르자 붕 하는 발동 소리와 함께 트럭은 미끄러지듯 산골길을 달려갔다.
10월 초, 달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랑림산맥에서 흘러내린 룡흥강이 산골짝으로 흘러 내렸고 그 룡흥강 줄기를 따라 월왕령을 또 넘었다. 임진왜란 때 이태조의 령정이 넘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월왕령은 영흥에서 요덕으로 가는 관문으로 이곳을 넘는 사람들은 눈물의 고개라 이름 붙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금야군을 거쳐 험한 산굽이를 지나 수용소로 가는 이 길은, 수용소와 외부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흰 모래가 선을 이뤄 빙 돌아간 위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감시등 두 개가 200m정도의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문으로 보이는 곳에는 무장한 두 명의 군인이 지켜서 있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보초병들을 향해 중좌가 뭐라고 하자 가시철망을 친 대문이 열리고 그 속으로 트럭이 빨려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시커멓고 뾰족뾰족한 건물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정신병자들을 수용하는 음침한 독방 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선인민경비대 2915군부대, 즉 15호 요덕 정치범수용소의 수감자들이 되어 버렸다. 꿈엔들 생각이나 해 본 곳이던가. 우리 식구 누구나 철문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그곳이 정치범 수용소인줄을 몰랐고 우리가 정치범이 되어 그곳에서 살게 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남1: 이거 빨랑 빨랑 못내려?! 뭘 이렇게 꾸물거리면서 기래?!
남2: 여, 1분대장.
남1: 예!
남2: 갸들 거 정리되는 대루 담화실로 보내라.
남1: 예! 알겠습니다.
고함에 쫓기듯 기와집 맞은편의 초가인 듯한 작은 집으로 들어가니 긴 목로가 두개 놓여 있었다. 난생 처음 목로의자에 앉으니 대좌 계급을 단 풍채 좋고 잘생긴 사람이 들어왔다. 수용소장 박청서 였다.
남1:당신들은 당의 유일사상체계에 저해가 되는 발언을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알겠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통제구역입니다. 편지도 안되며...일단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진심으로 당과 수령을 위해 헌신 한다면 새로운 삶이 고려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면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매장되는 곳, 이곳은 요덕 수용소며 당신들은 현재 수용소 수감자로 이곳에 와 있습니다.
여1: 아니, 수용소라니? 여기가 그럼 그 말로만 듣던...
남1: 그렇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며 상점도, 진료소도, 학교도 있습니다. 물론 연구실도 있고 학습실도 있습니다만, 명심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당과 수령의 크나큰 배려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 이제 김영자 세대는 식사를 하고 제3작업반으로 가시오! (음악)
그가 나간 후 웬 사람이 식당으로 가자며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박은 뺨을 쳐도 모를 정도로 캄캄하기만 했다. 다섯 살짜리 상현이가 식당에 간다니까 천진한 목소리로 옥류관에 가는 내게 물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이 콱 쏟아졌다. ‘그래 옥류관으로 간다’...
나는 그렇다 치고 천진난만한 애들까지 왜 이런 불쌍한 처지에 내몰렸을까.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기와집 뒤의 식당으로 가니 멀건 소금국에 통강냉이 밥이 나왔다. 습관 안 된 우리는 그 밥을 넘기지 못했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밤길을 떠났다.
구읍리 3작업반 까지는 안내자도 없었다. 세 번째 동네로 찾아가라고 해서 무려 두 시간 낯선 밤길 10여리를 걸어 3작업반으로 갔다. 어머니는 두 살 손자를 업고, 아버지는 열 살 손녀와 여덟 살 손자를 잡고 나는 다섯 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우리 일곱 식구는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산길을 걸었다.
너무나 캄캄해 발을 헛디디기가 일쑤였고, 나뒹굴었다가 다시 일어나 서로가 울면서 그 길을 갔다. 죄명도 모르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쫓겨 온 신세가 되었으니 무슨 희망인들 있었으랴. 되돌아갈 기약도 없었다. 절망을 뿌리고 눈물을 뿌리며 미지의 세계를 걷고 또 걸었다.
3작업반이란 곳으로 갔지만, 야밤이라 맞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민주선전실 간판이 붙어있는 빈 집으로 들어갔고 우리 식구 모두가 드러누워 버렸다.
(설화 여) 지금까지 원작에 김영순, 각색에 김민, 자유북한방송 아나운서들의 출연으로 들으셨습니다. 방송실화극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
청취자 여러분 그럼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는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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