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1회]
  • 관리자
  • 2010-06-04 11: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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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리실 실장과 부실장들도 내 제자들이었으나, 역시 자신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새로운 이론에 기초한 주체사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회과학원은 이런 기미를 알고 주로 선전부와 연계를 갖고 나의 주체사상 이론을 줄곧 헐뜯었다.

또 선전부는 강연안을 작성할 때 종합대학 학자들보다는 일정한 교육과제를 맡지 않고 있는 사회과학원 학자들을 주로 동원하는 것이 편리해,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 선전이 강화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주체사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주로 제3세계 나라의 학자들이었으나, 점차 일본과 유럽 선진국가들에서도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 또 세계 도처에 주체사상연구소조들과 전국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토오쿄오에는 북한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주체사상 국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초대 이사장은 토오쿄오대학 명예교수로 있던 야스이 카오루였다. 야스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다가 주체사상으로 전향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1977년 4월 평양에서 가진 주체사상 국제세미나에서였다. 세미나에 참석한 야스이와 나는 며칠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 역시 주체사상의 요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이 기억난다.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길을 택하셨습니까?” “인간의 정신적 해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섭니다.” “정신적 해방이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관한 사상 같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비슷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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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당 비서가 되고 나서도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임기가 끝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있었다. 북한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직책이지만, 외국에서는 오히려 국회의장직과 비슷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더 높게 인식했다. 그래서 나는 중앙당 비서가 된 다음에도 당 대표단이 아닌 경우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자격으로 외국을 방문하곤 했다.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쪽에서는 외무성 부상이 나를 안내했다. 나는 내빈자격으로 바간이라는 불교사원이 많을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불교의 심오한 교리에 탄복하고 있던 터라, 나는 바간의 오래된 사원들을 흥미 있게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원에서 이상한 보살상을 보게 되었다. 그 보살상은 오래되어 온통 새까맣게 녹이 슬어 있었는데, 배꼽 부분만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합장을 한 채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를 안내하는 외무성 부상도 그 보살상 앞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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