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8회]
  • 관리자
  • 2010-06-04 10: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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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난 2월 13일, 북한외교부에서 남조선당국이 나를 납치했을 경우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란ㄴ 성명을 발표했다고 대사관 직원들이 알려주었다. 중국외교부에서는 관련당사자들이 대국적 견지에서 냉정하게 대처할 것을 촉구하는 공식입장을 최초로 발표했다고 한다. 또 김하중 외무장관 특보가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외교부측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를 위로했다.

나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그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북에서 가지고 온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을 하면서 김덕홍의 사람 됨됨이에 다시 탄복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나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세심한 신경을 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덕홍은 밤이면 잘 들리지 않는 라디오로 남한방송과 북한방송을 청취하고는 내게 알려주었으며, 내 건강을 위해 내가 민망할 정도로 이것저것을 대사관측에 주문했다.

나는 그와 수십 년 동안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냈다. 또 양쪽 가족들도 우리의 결의형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가 그저 동생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도 귀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대사관의 모든 직원들이 우리를 극진히 보살펴주었고, 한국정부에서는 의사까지 파견하여 건강을 살펴주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평양상업학교 동창생과 제자들, 남한의 친지들 그리고 하와이대학의 글렌 페이지교수를 비롯한 세계 도처의 벗들로부터 격려의 전보가 날아왔다.

그러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돌연 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서울의 주요 신문사들이 내가 망명을 준비하면서 덕홍에게 은밀히 써주었던 쪽지 편지들과 일련의 논문들을 공개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도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정말로 들었다. 중국과 북한은 서로 간첩죄를 지은 범인을 돌려보내기로 협약을 맺은 상태이다.

그러나 서울의 언론에 발표된 그 논문들은 내가 주체사상 국제토론회 때 외국인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 만큼, 비준을 받지 않은 것이라 하여 비판을 받을 수 있어도 나를 간첩죄로 몰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망명을 준비하면서 덕홍에게 써준 편지글에는 북한의 비밀이 적지 않게 담겨 있어, 이것을 가지고 김정일이 간첩행위라고 강하게 주장할 경우에는 중국정부로서도 곤란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불안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이다.

1996년 11월 10일자로 내가 덕홍이 편에 우리의 망명을 주선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는 수첩용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신문에 발표되고 말았다. 물론 97년 2월 12일부터 신문에서는 나와 덕홍의 망명사실이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그 편지들은 감시가 너무도 엄중한 북한의 현실에서, 마음대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덕홍과 함께 산보를 하면서 수첩에 몇 자 적어준 것들이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몰라 불안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오직 신념 하나만으로 견뎌 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내 생일날인 2월 17일에 아내 박승옥에게 남기는 유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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