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67회]
  • 관리자
  • 2010-06-04 10: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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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대는 북한에서 유일한 종합대학이었다.

그런 만큼 대학총장은 북한의 권력층에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직급이었고 처우도 좋아 중앙당 고위급 간부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당시 내 나이 마흔 둘이었다. 김일성은 나를 김대 총장에 임명하면서 대학을 고등교육성 관할에서 내각직속 관할로 두도록 했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었고, 김일은 제1부수상으로서 사실상 수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대학총장이 되면서 대학은 김일성의 직속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는 서기실 업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또 철학연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총장은 이런저런 행정실무에 포로가 되어 이론연구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 판단해도 나에게는 행정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명성을 날리던 사람들이 총장으로 배치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점도 그 자리에 나서기가 썩 내키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김일성의 그늘 밑에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연구사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서기실보다 더 좋은 직장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큰 신임을 받았다면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당시 중앙당 부부장의 월급은 200원이었으나, 김대 총장은 중앙당 부장들과 같은 250원이었다. 또 승용차의 급수도 높고 병원도 한 등급 높았다.

김일성은 나를 총장에 임명해놓고 대학에 큰 관심을 기울여, 내가 총장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세세하게 취해주었다. 그는 자주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아봤으며, 시간이 나면 직접 방문하기도 하여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자녀교육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둘째딸 김경진에게 쏟은 관심은 남달랐다. 김일성의 둘째딸은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은 그 딸이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공부해야 한다면서 물리학과 경제학,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특수과정안을 짜도록 지시했다.

나는 김일성의 자녀들을 위해 자주 특강을 해야 했다. 김일성은 박사 목걸이라는 걸 만들게 하여, 내게 북한에서는 처음으로 찬란한 철학박사 목걸이를 걸도록 배려해주었다. 나는 걱정했던 총장직을 무난히 수행하면서 김일성의 관심과 배려 덕택에 날이 갈수록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대학으로서도 과학연구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나에게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당 과학교육부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행정사업도 잘 할 수 있다면서 나의 총장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기서 김정일과 처남매부간이 된 장성택과 김경희가 어떻게 결혼했는지를 얘기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 학교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장성택과 김경희는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학생들이었다. 장성택은 그 반에서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예술서클 책임자로서 아코디언 연주가 일품이었고, 노래와 춤에도 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리에 밝고 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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