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60회]
  • 관리자
  • 2010-06-04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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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이 소년이 자기 삼촌을 내쫓고 권력을 승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루는 김정일이 소련의 공업농업전람관을 가보자고 해서 그를 데리고 갔는데, 기술적인 문제를 자꾸 질문을 하여 통역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는 웬 기술에 그리 관심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모스크바 종합대학도 가보고 싶어 하여 안내를 했는데, 같이 간 소련공산당 조선담당 과장이 김정일에게 아부를 한답시고 한마디했다. “동무도 고급중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공부하시겠지요?” 그러자 김정일이 발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 김정일은 성미가 매우 급한 편이었다.

또 아랫사람에게 지시할 때는 상당히 엄격했다. 깊이 사고하는 형이 아니고, 감각이 예민하며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959년부터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서기실에서는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해 봄, 나는 김일성의 지시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며 형식상으로 국가수반인 최용건을 수행하여 사회주의 나라를 순방하게 되었다.

홍명희 부수상, 강양욱 최고인민회의 서기장도 동행했다. 대표단의 순방목적은 전쟁기간과 전후복구기간에 사회주의 나라 인민들이 보내준 원조에 사의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 그리고 몽골을 잇따라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사회주의 나라들은 탄탄한 연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 대표단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큰 사변을 겪은 나라답지 않게 발전해가는 헝가리와 수정주의 나라 유고슬라비아에 맞서 언제나 위협을 받고 있는 알바니아였다.

헝가리로 말하면, 나는 1950년 여름방학 때 소련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을 인솔하여 발라똔 호숫가에 있는 국제휴양소에서 1개월간 휴양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본 헝가리는 어찌나 경제가 어려운지 외국인인 우리도 배불리 먹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순방 때는 1956년 반정부폭동을 겪은 나라답지 않게 눈에 띄게 생활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중국으로부터도 적지 않은 원조를 받았다.

그래서 헝가리 지도부에서는 스탈린이 죽었으니 마오쩌둥을 세계혁명의 수령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친중 정책을 쓰고 있었다. 중국은 1956년 헝가리에서 반정부폭동이 일어난 것은 흐루시초프가 이미 죽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무산계급독재를 약화시키는 수정주의 노선을 강요한 결과라고 단정하고, 반수정주의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하여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영도권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알바니아에서도 중국에 대한 인기는 소련보다 앞서 있었다. 당시 알바니아 사람들의 생활은 북한인민보다 훨씬 어려웠다. 알바니아의 지도자 엔벨호자는 매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에 원조를 청하는 방문을 했다. 그에 따라 흐루시초프가 원조를 주면서 조건을 달았던 것과는 달리, 중국은 부대조건을 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가 요구하는 양보다 늘 더 주었다.

그리하여 알바니아의 마음은 소련으로부터 멀어지고 중국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최용건은 엔벨호자에게 유고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반원자 지하터널을 파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조선은 반원자 방어시설을 한창 건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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