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8회]
  • 관리자
  • 2010-06-04 10: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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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서기들은 일요일이면 사냥을 가거나 놀러 다녔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발전시킬 뚜렷한 목적으로 계속 철학에 매달렸다. 서기들은 정치국원들에게 철학강의와 경제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에는 김일성과 최용건만 참가하지 않았을 뿐 모든 간부들이 참가했다. 경제강의는 서기실장이 하고, 나는 철학강의를 맡았다. 나는 스스로 내 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마르크스의 열운 저서를 읽는 한편 유학시절의 강의노트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환상은 계속 남아 있었고, 소련유학시절 강좌장의 특강내용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1958년 11월, 나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서기실장과 함께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다. 나로서는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본토방문도 처음이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측에서는 김일성을 마중하기 우해 간부들이 단동까지 나와 있었다.

간부들 가운데는 외교계에서 일하는 조선동포도 섞여 있었다. 11월 말경인데도 밭에 추수하지 않은 옥수수와 수수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내가 물어보았다. “왜 저 옥수수와 수수는 추수하지 않습니까?” “아, 저거 말입니까? 저것들은 추수를 하나마나입니다. 내년부터는 1정보에서 500톤 내지 600톤의 소출을 내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추수를 서두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심경밀식(깊이 갈고 빽빽이 심는다는 뜻)의 방법으로 엄청난 수확을 올릴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우리가 중국으로 향하기 전에 중앙당에서도 소문이 돌기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것보다 비할 데 없이 큰 사변이라고들 했다. 그들은 벼를 빽빽이 심은 논의 벼이삭 위에 아이가 올라앉아 있는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열차가 산해관을 지나자 밤이 깊어졌다. 그런데 철길 옆으로 불빛이 이어졌다. “저 불빛은 뭡니까?” 동행한 중국관리가 대답했다.

“예, 저건 토법(재래식이라는 뜻)으로 강철을 생산하는 불빛입니다. 우리 중국은 앞으로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대약진을 하고 있습니다. 강철도 전체 인민이 현대식 용광로를 쓰지 않고 저렇게 재래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역에 도착하자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해 중국의 당과 국가 간부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오쩌둥이 무한에 있다고 해서 우리 일행은 곧장 무한으로 출발했다.

무한에 도착한 다음 김일성과 대표단 일행은 마오쩌둥과 회담하기 위해 떠나고 서기실장과 나는 숙소에서 연설문을 다듬고 있었다. 다음날 김일성이 돌아와 말했다. “마오쩌둥을 만났는데, 중국에서는 앞으로 경지면적을 3분의 1로 줄이고, 나머지는 목장과 공원을 조성한다고 하는군. 3분의 1에만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남아돈다는 거야.”우리는 다음날 저우언라이 총리의 안내로 무한의 어느 인민공사를 방문했다.

도중에 목화밭을 지날 때였다. 김일성이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수행하는 인민공사 사장에게 목화를 1정보당 얼마나 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이 15톤을 딴다고 대답했다. 또 밀밭에서는 1정보당 70톤을 수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3톤을 겨우 수확하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국에서 올해 5억 톤의 양곡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일성을 따르던 수행원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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