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4회]
  • 관리자
  • 2010-06-04 10: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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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 임무는 김일성 개인의 글을 쓰고 정리하는 일이었지만, 당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나가는 ‘결정서’나 ‘붉은 편지’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각 부서에서 들어오는 문건을 읽고 수정하는 일도 가끔 했다. 또 김일성이 중요 간부의 연설원고를 써주라든가 이론을 도와주라고 해서 맡겨진 일도 우리 몫이었다. 1958년 8월에 어머니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병은 김일성대학 사택에서 지낼 때 얻은 것이었다. 복도에 불을 넣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어두워서 아궁이 덮개를 열어놓은 것을 모르고 그만 헛디뎌 허리를 다쳤었다. 그런데 그 다친 허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중앙당으로 옮기고 생활이 좀 나아지나 싶을 때 돌아가셔서 가슴이 몹시 아팠다.

어머니가 손녀들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했는지, 그리고 돌아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집안의 자잘한 일들을 거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러면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형은 죽었지만 형수는 끗끗하게 살고 있었다. 큰조카는 나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 군대에 갔다가 돌아와 김일성대학 수학부를 졸업하고 국방과학원 로케트 연구소(후에 연구소장까지 하다가 198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조카 덕에 형수의 생활도 괜찮은 편이었다. 큰누이는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희생되었고, 매부는 다른 여자와 재혼해 살고 있어 나는 찾아가보지도 않았다. 둘째누이의 생활이 가장 곤란했는데, 그건 화물차 운전수를 하다가 전쟁 때 월남한 매부 탓이었다. 어렸을 적에 나를 가장 귀여워했던 둘째누이가 고생하는 게 여간 마음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 중에 둘째누이의 머리가 가장 뛰어났으나 여자라서 아깝다고 자주 말했었다. 훗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둘째누이가 오자 가만히 쳐다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마도 아버지의 눈물을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 같다. 둘째누이에게 매부가 왜 월남했는지 물어보았더니 쓸쓸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매부는 군대에 동원되었단다.

그런데 전장에서 인민군대가 후퇴할 때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있었어(그때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그리고는 당원도 아니어서 인민군대가 재차 공격할 때 처벌을 받을 게 두려워 뜻이 맞는 동무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어. 내려가기 전에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라. 당신은 앞으로 장엽이가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 도와 줄테니 남아 있는 게 좋겠다고, 그래 나는 남고 매부는 남으로 내려갔단다.”

차라리 그때 누이도 같이 월남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누이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그 딸들과 함께 승호리 부근 농촌에 돌아가 살고 있었는데, 월남자 가족이라 하여 구박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누이로서도 내가 중앙당에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김일성의 서기인 나를 봐서라도 알아서 좀 돌봐줄 걸로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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