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7회]
  • 관리자
  • 2010-06-04 10: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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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강의실은 아궁이가 없어서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에 불을 때야 했다. 생솔가지가 땔감이어서 강의실에 연기가 가득 찼으나 문을 열어둘 수가 없었다. 문을 열면 잉크가 얼고 손이 곱아 학생들이 필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학생들은 물론 교원들까지 소련에서 유학했다는 내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학교 당국도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강의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학생들이 해주려고도 했지만, 우리 방에 쓸 땔나무는 한사코 내가 직접 해왔다. 먹는 게 변변치 않았는데도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식사 때 국은 언제나 무를 조금 썰어 넣은 소금국이 나왔다. 우리는 이 국을 ‘염수대근탕’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소금물에 큰 뿌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염수대근탕을 매끼마다 먹는 바람에 다른 반찬이름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배급소의 게시판을 보니 점심에 된장을 공급한다고 적혀 있었다. 오랜만에 끓여먹은 된장국은 그야말로 별미였으며, 한편으로는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된장국 한 그릇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른 아침 솜동복을 입고 집에서 1킬로쯤 떨어진 강의실로 가는데 배급소 앞에 웬 사람이 떨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리 강좌 교수였다. “웬 일로 이 새벽부터 여기서 떨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오늘 새벽에 제 처가 몸을 풀었습니다.” “그래서요”

“새로 태어난 아이 몫으로 배급을 타기 위해 나왔습니다.” 나는 그 교수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해주고 가면서도 얼마나 생활이 어려우면 새벽에 난 아이의 배급을 그 새벽에 타러 나왔겠는가 싶었다. 아내는 소련에서 나와 결혼하느라 중도에 포기한 학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대찬성이었다. 그녀는 사범대학 노어과를 통신으로 졸업하겠다면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철학강좌에는 거의가 6.25때 월북한 사람들이 수강했다. 그들은 서울대학을 비롯한 남쪽의 대학 강단에 선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적은 나를 스승과 같이 대하면서 하나라고 더 배우려고 애썼다. 특히 함봉석 선생은 지식이 남달랐는데, 주로 독일고전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헤겔의 변증법에는 의문이 많았으므로 소련학자들이 해설한 것을 전달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함 선생은 매우 감동한 채 질문을 계속하면서 내 지식을 나누어 가지려고 노력했다. 나는 시간이 나면 연구하려고 수집해둔 독일고전철학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함 선생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뒤 그는 내가 준 자료를 이용하여 『독일고전철학』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을 출간했다. 나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평이 좋았다. 책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 선생이 나를 찾아와 원고료를 많이 탔다면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왜 이걸 저에게 줍니까?” “강좌장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책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성의니 받아주십시오.” 나는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렸다. 돈 봉투를 돌려주면서 선생의 모리가 좀 돈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함 선생의 순박함에는 그저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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