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38회]
  • 관리자
  • 2010-06-04 10: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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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당 위원회에서는 나를 신임했다. 대학 측은 소련에서 온 철학 부교수의 강의안을 나와 철학강좌장이 함께 번역해주기를 원했다. 나는 노어 실력을 쌓을 겸 그 일을 맡았다. 그러나 노어 실력이 달려 걸핏하면 밤을 새워야 했다. 훗날의 얘기지만 내가 모스크바에 유학하여 연구원에서 공부할 때 이 부교수와 함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의 수준이 너무 낮은 데 놀랐다.

그 교수는 결국 학과를 따라가지 못한 채 중도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 실력을 알기 전이어서 그의 강의안을 번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1949년 여름, 소련 철학교수의 아스므스의 논리학을 번역했다. 그러나 훗날 노어를 더 공부한 다음에 보니 번역이 어터리여서 스스로 낯을 붉힌 적이 있었다.

그래도 당시 번역을 할 때는 최선을 다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원 1학년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나는 뜻밖에도 소련 유학에 추천되었다. 늙은 부모님을 두고 멀리 타국으로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내가 소련 유학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송한혁은 나를 찾아와 김일성대학 연구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졸랐다.

나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는지라 대학 당 위원장을 찾아가 송한혁을 추천했다. 유학을 떠나면서 간곡히 부탁하는 터여서 그랬는지, 대학 당 위원장은 내 말을 들어 주었다. 송한혁은 김대연구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연구원에서 한 달 동안 공부했다.

하지만 경제전문학교에서 송한혁이 없이는 학교를 운영하기가 곤란하다면서 돌아와 달라고 하자, 마음이 흔들려 앞길이 보장되고 또 힘들여 입학한 연구원을 버리고 경제전문학교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스크바 종합대학. 1949년 10월 초, 나는 파견 연구원들 그리고 파견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을 떠났다.

두만강을 건너자 소련군용 트럭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워로실롭그라드 역’으로 태우고 갔다. 운전이 어찌나 난폭한지 차가 마구 요동을 쳐서 튼튼하지 못한 트렁크들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역에서 돼지비계가 둥둥 떠 있는 고깃국이 나왔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고깃국이라 기대를 하면서 달려들었는데,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 실망했다.

소련사람들은 대소변을 보는 방법도 우리와 달랐다. 화장실이 급해 병사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한쪽을 손짓했다. 그러나 그쪽을 찾아보아도 화장실은 없었다. 돌아와 다시 물어보자 병사가 말했다. “잘 찾아보면 있다.” 다시 병사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다가, 나는 어떤 소련사람이 가랑이를 벌린 채 돌멩이를 딛고 앉아 있는 걸 봤다.

소련에 기대를 걸었던 나는 맥이 빠졌다.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모스크바 종합대학에도 칸을 막은 화장실은 없고, 훤히 트인 곳에 놓인 변기에 앉아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뒤를 보게 되었다. 소변보는 곳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엔 이상했으나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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