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20회]
  • 관리자
  • 2010-06-04 10: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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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도움으로 평양상업학교에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형이 장가를 들었다. 형은 형수를 집에 두고도 직장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달은 아예 며칠씩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6학년이 되자 형은 벌이가 좀 나아졌는지, 당시만 해도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이나 입는 양복을 빼입고 고향을 드나들었다.

형은 평양의 어느 생명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형은 자기 회사에서 보통학교만 나온 사람은 자기밖에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는 했다. 보통학교 졸업이 다가왔다. 나는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더구나 내 성적은 사범학교에 진학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홍록 색맹 판정을 받고는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진학을 지도하는 선생은 취직하는 데는 상업학교가 오히려 더 유리하다면서 나를 위로해주었다. 상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유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바로 우리 형이었다. 형은 그즈음 완전히 자립하여 형수를 평양으로 데려간 뒤였다. 형은 내 학비의 일부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1937년 봄 평양상업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이 학교는 조선사람과 본인이 섞여 있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매년 모집인원은 조선인 25명, 일본인 25명이었다.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상업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넉넉한 집안의 자녀들이 아니었다. 일본인은 주로 상인의 자녀들이었고, 조선인은 대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민층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졸업 후 취직을 꿈꾸고 있었다. 때문에 평양상업학교에 입학하기란 일본인은 덜했지만 조선인에게는 과장되게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만큼 어려웠다. 합격통지서를 받을 무렵에 나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두 달 가량이나 시달렸다. 몸이 너무 아파 나는 입학식에 나가기는커녕 수업이 시작되고도 한 달간이나 학교에 가지 못했다.

퇴학을 당할까봐 걱정되어 학교에 나가 병이 나서 등교하지 못했음을 설명하자, 선생은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겠다는 듯이 그날로 내게 교복과 목이 긴 가죽구두를 지급했다. 동급생들은 내가 한 달쯤 결석을 하는 동안 벌써 영어를 어지간히 배운 상태였고 주판도 잘 놓았다. 그런데 나는 병을 앓은 뒤였고 기차통학을 하다 보니 피곤하여 공부가 자꾸 뒤처지게 되었다.

형이 평양에 있었지만 나는 기차통학을 했다. 승호리 읍에서 평양까지는 약 20킬로의 거리였고, 역은 승호리, 입석, 청룡, 미립 사동, 그리고 그 다음 역이 평양이었다. 나는 승호리로 가지 않고 2킬로를 걸어 입석에서 열차를 타고 사동에서 내려, 다시 전차로 갈아타며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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