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6회]
  • 관리자
  • 2010-06-04 10:32:05
  • 조회수 : 1,580
우리 집 사랑방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던 얘기를 했다. 그래서 어떤 얘기는 겨울 내내 서너 번도 더 듣는 수가 있어, 당사자가 시작은 하지만 중간쯤이면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돌아가면서 얘기를 이어가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자주 모이는 이유는 지주인 임씨네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씨네는 기독교 신자였는데, 소작인들이 찾아오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가난한 소작인들은 기름이 부족해 불을 켤 형편이 못되었으나, 우리 집은 기름이 늘 넉넉했고 이야기책도 여러 권 있었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등불을 켜는 게 불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게 싫지 않아 드러내놓고 기름이 아깝다는 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옛이야기에 흥미가 있어서 둘째누이에게 업힌 채 졸음을 참아가며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여섯 살이 되어서는 천자문을 공부하고 국문을 알게 되어 ‘장익성전’이라는 옛 소설이나 ‘삼국지’를 더듬거리며 읽었다. 어릴 때 나는 유난히도 겁이 많았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쉽게 뛰어넘는 문턱도 나는 그 앞에 멈춰 서서 조심스레 살피다가 넘고는 했다.

나의 그런 행동이 재미있었던지 동네 사람들은 내 또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계속하여 문턱을 넘는 시합을 시켰다. 나는 행동이 느리고 겁도 많았지만 말은 엄청나게 빨리 했고 또 조리 있게 잘했다고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게 또 신기했던지 나에게 말을 못한다고 골려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너, 아직도 말을 할 줄 모른다면서?” 그러면 나는 아주머니들이 놀리는 줄도 모르고 대답했다.

“내가 왜 말을 할 줄 몰라요? 우리 집에서는 못하는 말이 없는 걸요.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라요.” 내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웃으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많고 행동이 둔해서 누구와 싸움이 붙으면 대체로 얻어맞는 편이었다. 그러나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누이들이 소문을 듣고 부모님 앞에서 내가 싸움에 졌다고 놀리면, 나는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져주었다고 둘러대어 집안사람들을 웃기고는 했다.

세월이 하도 흘러 몇 살 때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나마 다섯 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왔는데, 그는 빈손으로 온 걸 미안해하다가 나에게 당시 아이들에게는 큰돈인 십 전을 주었다. 설에 세배를 가도 임씨네서나 동전을 하나씩 주었지 다른 집에서는 엿이나 한 가락씩 주던 때였는데, 어쨌든 그렇게 큰돈이 내 수중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형은 내가 손님한테 돈을 받은 걸 알고는 뺏으려고 했지만 나는 형에게 주지 않았다. 힘으로 뺏고 싶어도 아버지가 보고 있어 그렇게는 못하자, 형은 어머니에게 공연한 투정을 부리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더는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평소의 형과 비교할 때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잠을 잘 때 뺏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런 형을 오히려 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랫목에 잠자리를 펴고 누우면서 아무도 몰래 돈을 삿자리 밑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마치 돈을 바지에 넣은 것처럼 바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형은 식구들에게 내가 돈을 잃어버렸다고 떠들었다. 밤에 바지를 뒤져보았는데 돈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삿자리 밑에서 돈을 꺼내 식구들에게 보여주었다. 형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고, 식구들은 또 한바탕 웃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