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4회]
  • 관리자
  • 2010-06-04 11: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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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죽음

1993년 내가 국제비서에 재임명되면서 김기남도 선전비서에 임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사상이론문제위원회 위원장직을 넘겨주겠다고 김정일에게 건의했다. 그때까지는 선전비서를 김정일이 겸직하고 있었으나 이제 김기남으로 임명한 상황에서 내가 그 위원장직에 있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내가 주체사상담당비서이므로 위원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만류했지만, 나는 선전비서의 위신을 생각해서 그에게 위원장직을 넘겨주고 대신에 부위원장으로 있기로 했다. 또 국내선전에서의 이론문제에 관한 통제권도 선전부로 넘기고 주체사상연구소는 국제부와 통합하여 대외이론선전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 대신 중앙당내에 설치된 대외선전이론문제위원회 위원장은 내가 맡고, 부위원장은 선전비서와 통일전선부 비서들이 나누어 맡았다. 그러나 각 부서가 각기 자기들만의 목적을 꾀하려 들면서 좀체로 통제를 받지 않으려 했다. 더구나 나는 다른 부서와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이 기구는 결국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북한의 경제사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외화벌이를 위해 각급 기관에서는 너도나도 무역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그 돈벌이라는 것은 보잘것없었으며, 우왕좌왕하다가 과오를 범하고 도주하는 자들도 생기고 부정사고도 많이 발생했다.

김정일은 무역회사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해외여행을 제한하려 했다. 김정일의 직접적인 비준을 받은 대표단 이외의 해외파견 대표단은 예외없이 중앙당내에 설치된 파견 심사위원회를 거쳐 승인을 받도록 했다. 공안담당비서가 위원장, 국제비서가 부위원장, 그 밖에 군수공업담당비서, 경제담당비서, 과학교육비서, 간부담당비서 등 6명이 망라되어 매주 한 차례씩 심의를 열었다. 나는 될 수록 많은 대표단을 해외로 내보내자는 주장이었고, 공안담당비소는 가능하면 내보내지 말자는 주장을 폈다. 1993년 3월에는 핵사찰을 받지 않는다는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북한은 준전시태세를 선포했다가 해제했다.

김정일은 핵문제 협상에서 자신의 강경한 ‘벼랑 끝 전술’이 승리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이 전쟁을 피한 것은 현명한 조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북한은 전쟁을 하면 했지 미국의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는 또 북한의 고위급들이 김정일의 술 파티로 인해 적지 않게 죽었다. 술로 몸을 망가뜨리는가 하면 새벽에 귀가하면서 직접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기 때문이었다. (극비로 모이기 때문에 운전기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갈 수도 없었겠지만, 설사 그가 알고 있었다고 해도 90년대 들어서는 통제능력을 상실한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김정일 자신이 큰 사고를 당해서 한동안 업무를 못 보는 일이 생겼다. 뒷날 알고 보니 낙마한 것이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면서도 신병치료라는 말을 믿는 척해야 했다. 김정일은 오랫동안 집무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김일성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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