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12회]
  • 관리자
  • 2010-06-04 10: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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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을 알 수 없는 곳에 우리 숙소가 마련되었는데, 그곳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당황한 필리핀 당국은 그날 오후 헬기로 우리를 비밀리에 이동시켰다. 그리고는 우리 숙소를 이중 삼중으로 경호하는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했다. 또 경호를 맡고 있는 사단장이 이틀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상황을 설명하는 성의를 보였다.

필리핀 당국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두 번째로 옮긴 숙소는 몹시 불편했다. 사단장의 별장이라는 그 숙소는 호숫가에 자리 잡아 그윽한 정취는 그런대로 좋았으나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어 몹시 불편했다. 그나마 나와 덕홍은 한 방씩 차지하여 에어컨 덕을 봤지만, 의사를 비롯하여 우리와 함께 온 적지 않은 남측요원들은 주방 겸 침실로 쓰는 방에서 여러 개의 침대를 빽빽하게 들여다 놓고 지내야 했다.

때문에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베이징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아침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분들이 우리 둘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높은 수양을 쌓은 훌륭한 인재들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나는 더 이상의 의심이나 고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일렀다.

며칠이 지나자 스스로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무엇보다 베이징에 있을 때는 우리의 동정이 중국과 한국의 언론에 낱낱이 실려 심경이 불안했는데, 필리핀에서는 당국의 배려로 우리의 움직임이 전혀 노출되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사단장을 통해 필리핀 당국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김없이 아침 5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지속해 왔다.

베이징에서는 잘 되지 않았으나 필리핀에서는 이 규칙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떠나왔기 때문에 곧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껏 젖을 수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3월 23일은 내가 맹세문을 쓴 날이다. 가족과 동지들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보상하는 뜻에서 앞으로 전력을 다하여 조국통일을 위해 미력하나마 기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날부터 나와 김덕홍은 「주체철학의 기본문제」를 정리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베이징에서는 덕홍이 밤에 라디오를 듣고는 한국의 정세에 대해 얘기해주었지만, 필리핀에서는 그 나라 신문을 릭은 직원들이 알려 주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나는 대사관 직원들과 대화를 하면서 한국사회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걸 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망명을 주선해준 인사로부터 대통령선거 때문에 상황이 복잡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으나, 그 말 속에 우리가 남한으로 넘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은 세력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지는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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