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00회]
  • 관리자
  • 2010-06-04 11: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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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담의 부인 김정숙은 남편이 국제비서 자리를 차지하기를 늘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통일이 될지 모르는 터에 대남관계 비서가 되었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김용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하지만 김경희가 김용순을 감싸고돌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양형섭도 나름대로 사교성은 있었지만 김정일의 비위를 그리 잘 맞추지는 못했다. 허담은 매우 영리하여 김정일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나, 그이 처 김정숙은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한 수단가였다. 언젠가는 그녀가 공업출판사 사장으로 부임해 너무 못되게 굴자, 그곳 당비서가 참다못해 도끼로 찍어서 죽을 뻔한 일까지 있었다. 그 당비서는 총살되었다. 허담은 김정일의 뜻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 헐뜯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나는 허담이 김정일의 측근으로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김정일이 가장 경계한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계모인 김성애였다. 김정일은 김성애에 대한 김일성의 사랑을 떼어놓기 위해 김일성 곁에 미모의 젊은 여성들을 간호원으로 배치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양형섭, 허담, 김정숙을 축으로 한 패들은 김성애를 가차없이 잔인하게 공격함으로써 김정일의 신임을 얻어내고는 했다. 김용순이 국제비서가 되자, 권력내부에서도 이목이 집중되었다. 김용순은 김경희의 지지만 믿고 우쭐거리다가 드디어 그들에게 걸려들었다.

김용순의 비행에 대한 보고가 김정일에게 나날이 들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김용순이 국제부 직원들에게 외국손님을 가정에 초대해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부인들까지도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면서 직원부인들을 당 청사에 모아놓고 춤판을 벌인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당연히 시끄러운 시빗거리가 되었다. 춤판 문제가 공공연하게 터지자 김경희로서도 도와주기가 어려웠다. 김용순을 비판하는 본부당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에게 비서국을 대표하여 총화 결론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결론문은 보부당에서 써준 것이었다. 나는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용순은 1984년에 철직되어 평안남도의 탄광노동자로 내려가 혁명화를 겪었다. 김용순이 철직되고 며칠 있다가 김정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령님과 오래 토론했는데 황 선생이 국제비서를 맡는 것이 국제적 권위로 보아서도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과학교육비서는 내가 오랫동안 교육부문 사업을 해왔던 터라 조금 알고 있고, 또 주체사상연구소 일은 내 전공과 관련이 있어서 내게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만, 권력투쟁의 가장 첨예한 자리인 국제비서는 나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도 아시다시피 제 성격은 한 가지 일에 깊이 파고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외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하지도 못합니다. 자칫 일을 잘못하여 심려를 끼쳐드릴까 두렵습니다.” 김정일이 말했다. “외국 사람들과의 사업을 가장 많이 한 경험을 갖고 있고, 또 수령님께서 철학을 잘 하는 선생께서 국제비서도 잘할 것이라고 추천하셨습니다. 저도 황 선생이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내키시지 않더라도 후임자가 나올 때까지라도 좀 맡아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되자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주체사상연구소 소장과 겸직으로 국제비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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