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63회]
- 관리자
- 2010-06-04 10:51:12
- 조회수 : 1,626
나는 모스크바에서 김일을 수행하면서 그가 수양을 많이 쌓은 혁명가라는 걸 알았다. 김일은 김일성에게 무한히 충직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공산당을 예로 들면서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권위는 대단하지만 그래도 중국공산당에서는 마오쩌둥의 잘못에 대해 비판도 하거든.”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과 함께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1960년 나는 또 다시 최용건을 수행하여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방문했는데, 저우언라이 총리와도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저우 총리는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다른 이들은 모두 오침을 하는데도 계속 집무하면서 나를 불러 조선역사에 대해 듣고는 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조선말로 된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역사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귀국하여 책을 보내주었다.
저우 총리는 내가 보기에 매우 총명하고 성실하며 기지가 있었다. 연회 때는 우리측 단장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 덩샤오핑 등 중국의 권력실세들이 자리 잡았다. 늘 사람을 즐겁게 하고 웃기는 사람은 저우 총리였다. 그는 공장지배인이 손님들에게 공장 자랑을 하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했는데, 지배인들은 저우 총리의 지적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최용건으로부터 항일무장투쟁과정에 대해 많이 들었다. 중국사람들이 최용건의 투쟁경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만큼, 김일성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제기될 때는 최용건을 파견한 적이 많았다. 1961년이 되자 서기들은 9월로 예정된 제4차 당대회 준비로 바빠졌다. 나는 1959년부터 서기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2년이 지나서도 글 쓰는 재주는 늘지 않고 여전했다.
또 대부분 경제와 관련된 글이어서 경제전문가들이 많이 맡았고, 나는 연회연설이나 군중대회용을 준비하는 데 그쳤다. 서기들은 자기에게 떨어진 일감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불리했다. 그럴수록 나는 철학이론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나의 사고와 현실주의적인 김일성과 사고방식 간에 점점 간격이 벌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제4차 당대회 보고에서 나는 당의 건설문제를 책임지고 집필했는데, 그 후부터 자연히 당의 건설문제는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나는 창조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글을 다듬는 수준에서는 다른 서기들을 못 따라갔다. 특히 실장은 경제전문가답게 글을 논리적으로 짜임새 있게 다듬는 데는 나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문투도 내가 싫어하는 스탈린식 문투를 좋아했다.
나는 그때까지 『자본론』은 제1권만 읽었지 2,3권은 못 읽어봤는데, 그들이 『자본론』에 대해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억지로 2,3권을 읽었다. 그러나 지적인 소득은 별로 없었다.
1960년 나는 또 다시 최용건을 수행하여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을 방문했는데, 저우언라이 총리와도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저우 총리는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다른 이들은 모두 오침을 하는데도 계속 집무하면서 나를 불러 조선역사에 대해 듣고는 했다.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조선말로 된 것이라도 좋으니 조선역사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귀국하여 책을 보내주었다.
저우 총리는 내가 보기에 매우 총명하고 성실하며 기지가 있었다. 연회 때는 우리측 단장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주더, 덩샤오핑 등 중국의 권력실세들이 자리 잡았다. 늘 사람을 즐겁게 하고 웃기는 사람은 저우 총리였다. 그는 공장지배인이 손님들에게 공장 자랑을 하면 그 자리에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했는데, 지배인들은 저우 총리의 지적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최용건으로부터 항일무장투쟁과정에 대해 많이 들었다. 중국사람들이 최용건의 투쟁경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만큼, 김일성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제기될 때는 최용건을 파견한 적이 많았다. 1961년이 되자 서기들은 9월로 예정된 제4차 당대회 준비로 바빠졌다. 나는 1959년부터 서기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2년이 지나서도 글 쓰는 재주는 늘지 않고 여전했다.
또 대부분 경제와 관련된 글이어서 경제전문가들이 많이 맡았고, 나는 연회연설이나 군중대회용을 준비하는 데 그쳤다. 서기들은 자기에게 떨어진 일감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불리했다. 그럴수록 나는 철학이론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나의 사고와 현실주의적인 김일성과 사고방식 간에 점점 간격이 벌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제4차 당대회 보고에서 나는 당의 건설문제를 책임지고 집필했는데, 그 후부터 자연히 당의 건설문제는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나는 창조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글을 다듬는 수준에서는 다른 서기들을 못 따라갔다. 특히 실장은 경제전문가답게 글을 논리적으로 짜임새 있게 다듬는 데는 나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문투도 내가 싫어하는 스탈린식 문투를 좋아했다.
나는 그때까지 『자본론』은 제1권만 읽었지 2,3권은 못 읽어봤는데, 그들이 『자본론』에 대해 하도 떠들어대는 바람에 억지로 2,3권을 읽었다. 그러나 지적인 소득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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