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의 탄생과정(1)
작성자 CDNK
작성일 2011-06-26 22:28
ㆍ조회: 4641    
[황장엽 민주주의강좌]

본 방송은 황장엽 선생의 “인간중심철학원본”출간 기념일을 맞으며 북한에서 주체사상의 창시과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장엽 선생은 북한에 있을 당시 유일한 한사람의 철학자로써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하고 새로운 인간중심의 철학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1970년 초 황장엽 선생이 발견한 철학이론을 자신이 관리하는 216연구소에 넘겨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왜곡하고, 주체사상은 ‘김일성주의의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라고 선전했다.

황장엽 선생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정한 부분은 수령 우상화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주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황장엽 선생이 창시한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에 수령절대주의와 계급주의 의를 덧씌워 왜곡된 이론으로 변질시켰다. 황장엽 선생은 남한으로 망명한 후에야 자신이 바라던 대로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 학문이 바로 “인간중심철학원론”이다.

“인간중심절학원론”출판기념회를 맞으며 황장엽 선생의 방송을 두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인간중심 철학을 인본주의에 대한 철학적 이론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원래 맑스주의 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주체사상 이론 연구는 소련공산당에 알릴 수 없는 비밀

맑스주의 철학을 하면서 의문을 갖고 있던 것이 많았습니다. 내가 당(조선노동당)에 들어와서 맡은 것이 당의 지도이론입니다. 지도이론을 관리하는 사업을 근 40년 동안 했습니다.

당시에 국제비서요,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요, 대학 총장이요, 하는 것은 부업이고, 본업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밀사업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체사상은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사상입니다. 김일성이 처음에는 아무 권한도 없었습니다. 소련사람들이 자꾸 내세웠지만 실권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소련 군대는 하나도 안 나오고 김일성이 자체의 힘으로 최고사령관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면서 점차 기반을 꾸려나가는데 스탈린이 죽었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 중국의 모택동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주체사상을 강조한 사람은 모택동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겠다는 사상은 모든 공산당이 다 갖고 있었는데 제일 강하게 생각한건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소련의 국제공산당 간섭 때문에 피해를 제일 많이 본 것이 중국 공산당과 뽈스카(폴란드) 공산당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21년 당 창건 때부터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당 대표가 소련에 있었지만 국제공산당이 중국 실정을 모르면서 지시만 했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은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자꾸 앉아서 지시를 하니까 큰 손해를 봤습니다.

때문에 모택동은 스탈린을 아주 안 좋아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실질적으로 주체사상을 강조한건 모택동입니다. 김일성도 그때부터 자신의 독재체제를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 시기를 계기로 이런 사상이 나왔는데 소련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와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소련의 경험을 교조주의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래서 맑스-레닌주의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이었습니다.

그때는 주체사상이라는 말을 쓰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인데 다른 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썼다가는 큰일 나기 때문에 주체를 세워야한다고만 했습니다.

김일성의 우상화 작업은 연설에서 “스탈린 만세”빼기부터

내가 57년 말에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철학 강좌장을 하고, 과학연구부장을 겸하고, 대학 당 부위원장을 했습니다. 소환돼서 실질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58년 초이튿날부터 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온 김일성의 연설을 다 개작했습니다. 김일성의 연설에 있는 “스탈린 만세”를 다 빼고 그랬습니다. 그전에는 맑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다음에 김일성 저작을 넣던 것을 김일성을 맨 처음에 넣고 다 고쳤습니다.

그때 철학을 전공한 것은 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주체사상을 어떻게 철학화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주체사상을 맑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을 적용시켜 철학화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내가 하나 보탠 것은 자주적인 입장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 강조했는데 자주적인 입장 하나를 61년에 보탰습니다.

그렇게 했다가 점차 달라진 것은 개인숭배에 대한 사상이었습니다. 나는 소련에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부터 우상화에 대하여 반대했습니다. 그다음에 점차적으로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대학총장으로 나갔습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러 나갔는데 대학에서 자꾸 요구해서 60년에 중소논쟁이 있을 때 내가 이론 고문으로 참가해서 한 달 동안 계속 논쟁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쓰려고 했던 글이 있습니다. 그걸 발표했다가 “수정주의다!” 해서 한 이태동안 비판을 받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잘 모를 것입니다.

66년부터 이태동안, 처음에는 김일성이 그렇게까지 비판 안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고모사촌 허담의 부인, 양영섭의 부인이 자꾸 얘기하고, 내 주장을 지지하는 줄 알았던 김일성의 사촌동생 김영주도 얘기했습니다. 김영주와 전화도 오갔는데, 그는 완전히 모택동 사상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나하고 친했는데 한몫 보려고 그랬는지 그때부터 전화를 딱 끊었습니다.

그 때는 김정일이 그리 중요한 지위에는 있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삼촌 얘기를 듣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김일성, 황장엽은 철학박사가 아니라 조립박사다

김일성은 만경대학원 애들 모아놓고 “너희들은 황장엽 같은 철학자가 되면 안 된다. 황장엽은 여기저기서 따다가 조립해서 만드는, 진짜 철학박사가 아니라 조립박사다”라고 얘기하는데 나보고 들으라는 얘기였습니다. 중앙당 성원들이 모여 있는데 그 녹음을 돌리고 나보고 꼭 오라고 해서 가 앉아있으니 김일성과 최용권이 돌아보고 가는데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나는 내가 잘못한건 없는데 알고나 죽어야 될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각해서 60년대 말에 가서 새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김일성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내가 자아비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평남도당 책임비서 하던 사람은 있었는데 일을 저지르고 김일성한테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해서 “저것도 사람인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그러면 되지 왜 비굴하게 노는가고 말입니다.

김일성이 내게 “조선혁명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왜 그리 쓸데없는 이론을 주장해서 말썽을 일으키는가?” 고 그럽니다. 또 “왜? 사람들 속에 여론을 환기시키는가?”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는 내가 탄복했습니다. 내가 자아비판하면서 “죄송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라고 하자 김일성이 “그러면 됐다”고 그럽니다. 그때까지 내 처나 주변사람들이 모두 철직되었는데 그 후에 회복되고 나서 김일성이 “누군 어떤가?”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새 철학을 내놓으려면 김일성 곁에 있어야만 했던 속사정

그런데 그때는 내가 새로운 철학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철학을 갖고 다른 데로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철학을 실현하자면 김일성의 명의로 실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1970년 10월경이었습니다. 그러자 김정일이 자신이 노력해서 만든 것처럼 아첨을 피웠습니다. 70년 그때는 김일성이 대학에도 나와 보고 할 땐데 내가 김일성하고 단독으로 만나자고 하니까 승낙했습니다. 김일성과는 단독으로 만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김일성과 단독으로 만나서 “이것을 철학화해야 한다. 주체철학이 철학화 되지 않고 있는데 철학화해야 한다”고 하자 김일성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동생 김영주한테 전화해서 “황 총장은 이제부터 초대소에 나가서 철학 만드는 것만 하게 하라. 총장사업은 제1부총장에게 맡겨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황해도 달천에서부터 시작해서 3년 6개월 동안 했습니다. 그 과정에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 “맑스주의 철학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유물론과 변증법, 유물사관을 모두 고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6개월 하니 기본 틀거지가 잡히고 완성하느라 3년 6개월 걸렸습니다. 이걸 김일성에게 올리니 기술서기인 이근일이라고 어머니가 김영화인데 빨찌산 회상기를 많이 쓰는 여자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김일성이 “읽었는가?” 물어보니 “자꾸 가방에 넣어라 해서 한 21일이 지났는데도 8페이지밖에 못 읽었다”그럽니다.

그러다가 72년에 헌법 만들 때, 평북도 수풍댐에 휴양소가 있어서 거기 가서 한 달 동안 김일성과 같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먹으면서 김일성에게 “읽었습니까?”하고 물어 보니 “못 읽었다”며 “읽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쉽게 할까요?”하고 물어보니 그 철학 이론가운데 “간단하게 대여섯개 만들어서 발표하자!”그럽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처음으로 쓴 것이 “주체사상과 조선노동당의 대내외 정책”입니다. 그것을 발표하니 김정일이 좋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주는 맑스주의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은 나와 만나서 “삼촌도 야단났다. 주체사상이 이렇게 좋은데 반대하고” 그럽니다.

그 후에 김일성보고 “이제는 큰 거 발표합시다!”고 말하자 김일성이 내가 “맑스나 레닌보다 더 위대하다고 해도 될까?”하며 동요했습니다.

그래서 후처의 오빠 동생이 우리가 글 쓰는 곳에 있었는데, 이 사람을 내가 간부사업해서 불러들이면서 추동해서 김일성에게 말하게 했습니다.

김정일, 216서기실을 동원하여 황장엽의 논문 왜곡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있었더니 김정일이 전화로 “나도 좀 해보고 싶다!”그럽니다. 내가 김일성에게 올린 건 모두 김정일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216호실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철학과 졸업생, 공부 잘하는 사람이 한사람 끼여 있고 나머지는 모두 신문기자 출신이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그걸 이용해서 “나도 해보고 싶다!”그런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맑스주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4월 25일에 나온 “배낭을 메고 군중 속에 들어가 선전사업을 하자”는 논문이었습니다. 216호실에서 김정일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서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주의라는 말을 제일 먼저 쓰고, “김일성주의는 주체사상을 기초로한 사상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체계이다”고 말했습니다.(계속: 다음 방송에서는 주체사상을 인간중심철학으로 발전시킨 4개의 기본내용에 대하여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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